한라에서 백두까지, 잿빛이다. 북한은 핵실험 강행에 이어 정전협정 백지화를 선언했고, 한미 양국은 최첨단 전투기를 동원한 무력시위로 이에 응수했다. 통신선 차단, 최고 수위의 전투태세 등으로 위협 수위를 높여가던 북한은 기어이 남북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의 운영을 중단하기에 이르렀고, 서울 시내엔 북쪽 하늘을 겨냥한 미사일이 배치됐다. ‘안보불감증’을 힐난하던 언론들은 한 번 뜨는데 62억이 든다는 2조원짜리 폭격기의 스펙타클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이어 후세인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준엄한 가르침을 내보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란 두 세대 전의 낡은 관용구가 곧 재현될지 모를 생생한 팩트가 되어 다급하게 보도된다. 개성공단 근로자들은 남으로 내려오는데, 무심한 개화선만 북으로 올라간다.

바다 건너에선 ‘훈수’를 보태왔다.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 채널, <월스트리트저널>은 개성공단을 아예 패쇄하라고 주문했다. 개성공단 중단은 돈을 얻어내기 위한 ‘공갈’이며 북한정권 유지에 ‘악용’되는 공단을 ‘영원히’ 폐쇄할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사설인데, 그 제목이 ‘개성공단이 없어져 속시원하다(Good riddance to Kaesong)’였다. 이것은 쓴소리도 아니고 잔소리도 못된다. 오직 부정적 측면만으로 일관한 그 논리의 편협성도 그렇거니와 이 땅과 이 땅 사람들에 대한 진정성이라곤 한 줄도 찾을 수 없는 ‘수입산 이간질’일 뿐이다. 미 보수세력 중에서도 ‘매파’의 입 노릇을 자임하고 오랫동안 ‘북한 때리기’에 열 올렸던 <월스트리트저널>아닌가. 애초부터 개성공단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햇볕정책’에도 사사건건 딴지를 걸었던 이들은 연일 위기, 긴장 운운하는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가장 정당한 전쟁보다도 부당한 평화가 훨씬 낫다”고 말한 것은 키케로였다. 각주가 많이 필요하지만, 폐기될 명제는 아니다. 대의나 명분이 없는 전쟁은 없었다. ‘공격’의 정당성과 ‘방어’의 불가피함은 양쪽에서 엇갈리고, 책임의 주체는 정확히 뒤집힌다. 가한 자도 당한 자도, 이긴 쪽도 진 쪽도 모호하다. 발발 10년, 상흔과 폐허를 남기고 한 쪽엔 천문학적 부채를, 다른 쪽엔 또 다른 전쟁을 야기한 이라크 전쟁은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그러므로 총부리를 거두자는 언설을 ‘불감증’쯤으로 비난하는 언설은 북한이 쏟아내는 위협적 수사에서 그리 멀지 않다. ‘팍스 아메리카나’에 기댄 전쟁의 부재를 평화라고 믿는가, 믿지 않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은 눈 먼 ‘주전론’일 따름이다. 햇빛정책을 폄훼한 언설들이 천안함과 연평도의 병사들을 구하지는 못했다.

평화를 위한 대책은 평화, 그 자체여야만 한다. ‘평화를 위한 전쟁’은 기만이고 언어도단이다. 화해를 위한 주먹질이란 게 있을 수 있는가. ‘군산복합체’ 본토의 한 논설위원이 쓴 사설이 노리는 바야 뻔하다. 이라크 침공 당시에도 전쟁을 부추기던 목소리는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를 ‘받아 적고’ 거기에 덧대 ‘조공’, ‘굴복’, '버르장머리’ 운운하다 ‘전쟁불사’를 외치는 ‘우국지사’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것은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안보를 내세워 단호와 강경을 말하기 전에 역사 앞에서 상식과 양심을 돌아볼 일이다. 한반도에 무기를 불러들이는 모든 언설들에 반대한다. 총부리를 내려놓는 일이 곧 화다. 쇠붙이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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