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으랴! 우리가 ‘자본’이 사회의 가장 큰 동력인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으니 자본이 삶의 유일한 잣대인 오늘날의 세태에 대하여 달리 뭐랄 수도 없다. 그래서일까? 알바몬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들 관심사는 온통 돈이다. 등록금과 생활비, 그리고 취직을 위한 학점과 스펙관리에 정신 팔려 자아 성찰에 관한 관심도는 고작 2.8%에 불과했다. 자본이 그렇게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다면, 물질적 부가 과연 삶 전체를 걸만한 것인지 따져보는 일이야말로 중요한 일일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그토록 애타게 ‘물 건너 온’ 명품상표를 쫓는 심리에는 부자가 아니라는 열등감과 부자가 되고 싶다는 부러움이 뒤섞여 있다. 그런데 정작 돈 많은 사람은 명품 상표로 자신을 굳이 휘감지 않는다는데, 그 이유는 언제든 소유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다는 물질적 여유와 물질적으로 굳이 남에게 과시할 필요를 덜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부자의 요건은 명품 구매 여부와는 직접적인 상관성이 없다.
 
  명품뿐만이 아니다. 돈만 많으면 부자라고 할 수 있는지도 따져볼 일이다. 돈이나 명품 소유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스스로 자신을 가치 있다고 느끼는 자존감과 자주성이지 않을까. 평생 남들에게 잘 보이려는 욕구에 사로잡혀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는 한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결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 돈이 필요하지만, ‘돈’이 곧 행복한 삶을 결정짓는 유일한 잣대가 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획일화된 시선은 그 자체가 이미 폭력이다. 예를 들면 르네상스기에 발견한 중앙원근법은 사물을 바라보는 ‘하나의’ 예술적 표현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제도화된 표현방식으로 정착되어 소위 ‘객관적’인 표현방식으로서 예술과 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이런 제도화된 표현방식은 유의미한 성공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사물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가로막는 편협성을 담고 있다. <몽유도원도>가 중앙원근법에 따르지 않았기에 회화적 아름다움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한때 1억 모으기 부자아빠 되기 등 부자열풍이 분 적도 있었는데, 도대체 얼마를 소유해야 ‘부자’가 되는 가? 소유할수록 더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배가될 것이기에 부자가 되는 것은 요원할 것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 서 그림자를 잡으려 한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그림자를 잡으려고 뛰면 뛴 만큼 그림자도 뛸 것이니, 그늘 아래 서야 비로소 그림자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남들 시선이나 돈의 소유 정도보다 ‘어떻게 나답고 행복하게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대학은 학문적 성찰을 통해 삶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깊이 익히고 이해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이 그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스펙을 쌓아 정규직을 얻기 위한 직업학교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모두가 제자리에서 자기 본연에 충실할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한 부자’가 되지 않을까?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제대로 있는지 물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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