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을 다루고 있는 대개의 영화들은 남포동, 영도대교, 항구, 해운대, 광안대교 등 관광지의 풍경을 통해 부산을 보여주고, 규정하려 든다. 이러한 영화는 부산 공간의 균열적인 면과 특질적인 면을 담아내지 못한다.

  또한 그것은 부산의 이질적인 면은 무시한 채 부산을 한 가지의 ‘공통적’인 모습으로 묶어 내려는 욕망을 보인다. 이를 통해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은 부산이 강렬한 지역색깔을 내포한 주변부 도시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부산은 매일이 ‘변화 중’인 도시지만 영화 속 부산은 매번 똑같은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다. 부서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일상인 부산에서 동일한 모습(남성들의 폭력, 사투리의 강화)만을 줄기차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모순적인 것이 아닌가. 즉 부산이라는 표상들이 상기시키는 영화 속 부산(이미지)이야말로 모양 좋고 읽기 쉽게 제작된 것은 아닐 런지. 

  이 지점에서 최근 개봉한 영화 <해운대>(윤제균, 2009)를 살필 수 있어 보인다. 이 영화는 특히 부산도시를 단순화 시키고 있는 영화다. 영화 속 부산은 몇 가지 이미지들로 ‘이곳이 부산이다’라고 정의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시도 때도 없이 ‘자이언츠 야구’ ‘해운대해수욕장’ ‘해운대 시장’ ‘달맞이 언덕’ ‘이기대’ ‘생선회’ ‘부산사투리’ ‘누리마루’라는 이미지들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이미지들은 부산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부산을 대표하는 유명한 것들이다.

  문제는 영화 속에서 이 이미지들을 부산이라는 도시를 ‘정의’내리는 데 쉽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카메라가 광안대교를 비추고 사람들이 부산사투리를 쓰면 그곳이 부산이 되고 부산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부산의 이미지들을 통해 영화를 팔고 부산을 상품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부산시청이나 구청의 행보와 동일하다. 영화가 개봉한 뒤 부산시청 직원들은 <해운대>가 부산영화라도 되는 것처럼 떼를 지어 관람을 했으며, 이 영화가 부산의 특산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홍보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영화가, 영화에 등장하는 부산의 모습이 부산을 제대로 보여(알려)줄 수  있는 것일까.

  ‘해운대’는 여름의 공간이다.  즉 피서라는 면목으로 잠시 쉬었다 돌아가는 곳이 바로 해운대다. 돌아가는 자(관광객)들은 해운대에 누군가 삶을 꾸리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해운대에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모른 채 그저 바다를 소비하고 떠날 뿐이다. 그들은 최첨단 도시로 변모된 광안대교나 신도시의 화려함에 현혹되어 해운대를 마구잡이로 소비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해운대는 삶의 ‘구체성’을 상상할 수 없고 ‘스펙터클’만 남게 된다. 영화 속에서도 해운대에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은 거주인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영화적 감동을 주기 위한 존재로 작동하고 있다.

   영화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처럼 말이다. 영화 속, 해운대 시장 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상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철저히 이분법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피서객/거주인이지만 그들의 모습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뜻이다. 그들 모두 쓰나미에 공격(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휩쓸려 사라져가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쓰나미가 몰려오는 곳이 ‘해운대(부산)’가 아니어도 상관없어 보인다. 크고 높은 건물, 피서객, 쓰나미만 있다면 인천이나 포항이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부산 공간은 하등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사투리를 쓰고 화려한 광안대교의 무너짐이 중요할 뿐이다.

  이렇듯 <해운대>에서 보여주고 있는 부산의 모습은 분명 사람들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서 일상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고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그저 부산이 욕망하는 이미지들만을 재생산하는 것과 같다. 부산시청의 욕망과 동일하게 말이다. 이는 더욱 더 부산을 추상적으로 만들며 스펙터클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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