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칸’에 대한‘ 꼬리칸’의 봉기를 다룬 영화 <설국열차>는 그 자체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그 계급적 질서에 대한 비유이다. 많이 가진 소수에 대하여 가진게 없는 다수의 분노와 저항이 영화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골격이라 한다면, 난관을 헤쳐 가며 전방으로 진격하는 인물들의 노력은 세계의 모순을 극복하고 타파하기 위한 숭고한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체제를 전복하고, 보다 평등한 새로운 체제를 세우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열차를 만든‘ 윌포드’를 만남으로써 일단 정지된다. 윌포드는‘ 커티스’들의 혁명이‘ 기차’의 폐쇄적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한 반혁명적 기획의 일환일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시스템의 완전한 전복이 아닌 지속적인 유지만이 유일한 대안이 될 뿐이라는 것을 일러준다.

영화는 시스템의 폭파를 통해 관객에게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목도하게 함으로써 하나의 대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북극곰’ CG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공상의 영역에 가깝다. 결국‘ 혁명’의 길고도 참혹한 과정을 헛짓거리에 불과한 것 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영화의 결말은, 그리고 새로운 창세기의 제출 없이 우리가 살고 있는 복잡다단한 세계를 변혁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그만큼 역설적으로 정치에 대한 감독의 냉소를 짙게 드리우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테러 라이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에서 테러리스트의 의도는 어떤 면에서 차라리 순수하다. 대통령의 사과만 있으면 모든 상황이 종료된다는 그의 말에는 정치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방송국 관계자, 청와대, 국회, 경찰, 군대와 같은 언론권력과 치안권력은 테러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음모와 술수, 정략이 판을 치게 하는 원인으로 만들어버린다. 순수한 발신에 대한 순수한 수신이 계속 지연되고 어긋남에 따라 영화는 결국 발신자(테러리스트)와 메신저(방송국 관계자), 수신자(정치권력자) 모두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감기>는 정치의 무능력과 무기력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예가 된다. 살처분을, 발포를, 미군의 개입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통치자들은 끔찍하게 죽어가는 ‘국민’들과 대비되면서 스스로의 무력함을 증명한다. 사태를 올곧게 판단하는 대통령만이 이 모든 갈등을 일거에 해결하지만, 그것은 정치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 것이라기보다 판타지를 가까스로 끼워 넣어‘ 봉합’한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최근에 흥행한 한국 영화들에는 정치와 권력에 대해 말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태도는 가능성과 희망이 아니라 거절과 불신이다. 정치는 엔터테인먼트의 도구적 소재나 가상세계의 유희적 대상으로 소비되는 것으로만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정치의 실제적 효용과는 상관없이, 정치의 위상은 그만큼 추락했다. 그러나 정치와 결별 가능하다는 환상은, 정치를 관조할 수 있다는 오만은 우리를 더욱 더 학점에, 토익 점수에, 취업에 목매달게 만들려는‘ 머리칸’들의 책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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