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도서관의 역사

도서를 제때 반납하지 않아 신문에 이름이 실려야 한다면? 한 권의 도서를 대출하기 위해 한 시간도 넘게 기다려야 한다면? 이 모든 것이 우리학교 도서관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개관 이래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우리학교 도서관의 과거를 살펴보자.

도서관, 싹을 틔우다(1946~1980)

우리학교 도서관은 1946년 개교와 동시에 사무국 산하에 설치됐다. 약 5만 권의 도서를 인수해 도서관의 구색을 갖췄으나, 전쟁 상황으로 인해 서고와 열람실 확보에 무리를 겪었다. 이후 독립적인 도서관 건립을 위해 교수들이 직접 도서관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고, 1966년 중앙도서관을 신축 개관했다. 당시 도서 이용 시 엄격한 기준이 적용됐다. 70년대 전까지 관외 대출이 불가능했고, 폐가제 방식이라 창구에 열람신청서를 제시하고 기다려야만 도서를 열람할 수 있었다. 1974년부터 관외대출이 가능해졌으나, 반납독촉기일이 경과하면 연체료를 내는 것과 더불어 1년간 도서 대출이 정지됐다. 법학도서관 이시채 팀장은“ 도서열람이 힘들었던 만큼 학생들의 태도도 조심스러웠다”며“ 요즘 학생들은 개가제 방식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함부로 도서를 훼손하는 경우가 있는데, 도서관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도서관 개혁 시대(1980~1994)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학생 수가 급속도로 증가했고, 큰 규모의 현대적인 도서관을 필요로 하게 됐다.따라서 1980년 신축도서관(현 제2도서관)이 개관됐고, 이전 중앙도서관은 ‘과학분관’으로 불리게 됐다.

1982년에는 도서관 열람석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단과대학 과제도서실운영이 실시됐다. 이 시기에는 신축된 중앙도서관의 4열람실은 정독실로 활용돼 각종 고시를 준비하는 법과대학, 상과대학, 공과대학 학생들의 자리를 각각 지정 배정하기도 했다.

성숙한 대학도서관으로 발돋움하다 (1994~2006)

중앙도서관 신축 후 7년, 건물 규모와 시설 면에서 한계에 도달했다는 의견이 학내에 팽배했다. 이에 본부는 1994년 신축도서관(현 제1도서관)을 개관하고, 이원체계를 수립했다. 신축도서관은 연구도서관으로, 기존도서관은 학습도서관으로 사용하게된 것이다. 또한 장서수가 대학의 중요한 평가기준으로 떠오르면서 ‘도서 100만권 확보 사업’이 추진되기도했다.

1998년까지 우리학교 도서관은 국내자료, 외국학술지 등과 같이 자료의 형태 중심으로 자료를 구분해왔기 때문에 학생들은 원하는 자료를 찾기위해 여러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이러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도서관은 주제별로 자료를 분류한‘ 주제도서관’으로 대폭 전환됐다. 이시채 팀장은 “당시 사서들은 주제도서관을 적극 추진하고 있던 외국 대학 도서관을 견학하며 새 도서관의 모습을구상했다”고 말했다.

과학분관은 1999년부터‘ 자율도서관’이라는 이름의 보존서고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김동철(사학) 교수는“자율도서관은 대학입학 시험지를 채점하는 장소라 교수들이 한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었다”고 회상했다.

 

다원 캠퍼스? 이제는 다원 도서관 ! (2006~현재)

2006년 밀양대학교와의 통합으로밀양대학교 도서관이 나노생명과학도서관으로 재개관했다. 이후 양산캠퍼스 의생명과학도서관, 법학도서관과 더불어 다원캠퍼스 시대가 열렸고,현재는 캠퍼스 간 상호대차 시스템이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자율도서관은 본래 기능을 상실했다는 판단 아래 2008년 10월 완전히철거된다. 민병권(전자공 73, 졸업)씨는“ 초기 도서관은 부마항쟁의 발상지였으므로 당시 학교를 다닌 졸업생들에게는 역사적인 의미가 컸다”며 철거에 아쉬움을 표했다. 이후 우리학교 도서관은 자동 대출⋅반납시스템을 도입하고, 그룹스터디룸과 노트북 열람실을 만드는 등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김동철 교수는“우리학교 도서관의 과거 모습을 통해 학내 구성원들은 도서관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며“ 기본 기능을 바탕으로 우리학교만의 상징성을 가진 앞으로의 도서관을 기대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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