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 인류의 사유와 정서가 응축된 것이기 때문에 지성인이라면 다양한 고전을읽고 그 내용을 체화시켜서 오늘날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삶을 보다 의미 있고 풍부하게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전읽기와 토론’은 인문학적 사유를 함양하고 반성적, 비판적 태도를 길러준다. 전공 과목에 임하는 노력의 절반만이라도 고전읽기에 투자한다면 인문학적 사유 태도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깊이 있는 공부가 필요한 것이 고전이며, 고전은 그만큼 인문학적 사유를 키워준다. 필자는 ‘고전읽기와 토론’에서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다룬다.
 
이 책은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이송시키는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다루고있다. 그녀는 사유 불가능성과 악의 평범성 개념을 도입한다. 모든 인간은 특정한 조건이 주어지면 누구나 악을 범할 수 있으며, 평범한 사람들이 악을 저지르는 것은 스스로 반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도 자기반성 없이 명령만 따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악을 범하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타고난 악인이나 타고난 착한 사람은 없다. 아렌트는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언급하면서, 아이히만의 비극은 이성을 올바로 사용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특정 조직이 부과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행위이다. 자신이 속한 회사, 단체, 정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민 대다수의 피해가 명백한 행위조차도 거리낌 없이 수행하는 것은 이성을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범죄이다. 반면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벗어나 보편적 인간의 차원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인간이 미성숙 단계로부터 못 벗어나는 것은 스스로 이성을 사용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는 일은 피곤한 일이며 정해진 규칙을 생각 없이 따르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렌트는 공적 인간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의식을 공통감, 즉 역지사지의 정신이라고 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밀그램은 ‘권위에의 복종’에서 아르바이트생에게 방 안에 있는 사람이 잘못을 했으니 전기 충격을 가하라고 명령하면 ‘거품을 물고 기절하고, 피를 토할 정도까지 계속한다’는 실험 결과를 제시한다. 그렇게 전기 고문을 가한 이유는 ‘주인이 명령하기 때문에’ 또는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돈을 못 받을 것 같아서’이다. 어떤 조직이건 명령의 정당성을 반성 없이 따르다 보면 악인이 될 수 있다. 아이히만은 조국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기에 애국자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행위가 초래한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최근 ‘국정원’의 정치 개입도 이런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조직의 ‘이익’이 절대적 기준이 되면 국민의 ‘기본권’은 가차 없이 팽개쳐진다. 국정원의 ‘내란음모죄’ 부활과 야권에 대한 백색테러 발생 뉴스를 접하면서 한국전쟁 직후의 정치 상황이 연상된다. 최소한의 합리성조차도 갖추지 못한 정치 지도자들, 무조건 명령에 따르거나 왜곡된 애국주의에 휩쓸려 행동하는 이들 모두가 악을 범하는 것이다. 기본권을 부정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사유가 없는 시대에 사유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자들의 고통스러운 사유 태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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