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0일, 용산 4구역 재개발 반대 농성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6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가족과 철거민들은 경찰의 강경진압에 분노하며 촛불을 들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테러리스트’라는 오명과 ‘경찰진압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검찰 조사 발표뿐이었다. 시든 국화잎처럼 대중의 뇌리에서 조금씩 잊혀져가고 있는 용산 철거민. 그들은 여전히 현장에 남아있다.

눈물은 마르고 분노만 남았다
  ‘사는 것도 괴로웠거늘, 죽는 순간까지도 고통스럽게 죽어간 불쌍한 나의 이웃들’ 화재 건물 입구를 막고 있는 전경버스에 추모 문구가 휘갈기듯 남겨져 있다. 건물 주변에는 전경버스 십여 대가 주둔해 경찰들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다.
 

  참사 현장 길가에는 전체 16가구가 비닐 천막을 치고 생활하고 있다. 한 철거민이 “노인과 중년의 여성들이 전기장판과 구식 난로 하나에 의지하고 있다”며 한숨을 내쉰다. 길 한 켠에는 다섯 명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분향소가 설치돼 있다. 참사 직후에는 시민들이 많이 찾아왔지만 지금은 시든 국화 몇 송이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용산 4구역은 2007년도에 재개발 지역으로 고지돼 작년 3월부터 개별적 보상이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재개발 조합측이 세입자들에게 턱없이 적은 보상비를 제시하면서 마찰이 생겼다. 노한나(자영업,51) 씨는 “우리는 권리금까지 내고 들어왔는데 보상금으로 달랑 300만원이 고지됐다”며 언성을 높였다. 또한 용역 업체의 비인간적인 행위로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노 씨는 “용역 깡패에게 욕설을 듣는 것은 일상이었다”며 “그들이 가게 앞에 죽은 비둘기와 쓰레기 더미를 던져 놓기도 했다”고 말했다. 여관을 운영했던 장복례(자영업, 70) 씨도 “어느 날 갑자기 재개발 한다고 나가랬어, 용역 깡패 놈들이…”라며 말을 잊지 못했다.

떠나지 못한 사람들
  이미 한차례 철거가 진행된 후라 골목의 집들마다 붉은색 스프레이로 쓴 ‘공가’ 표시만 선명했다. 예전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는 용산구시장(신용산노점) 역시 이미 시장으로서의 기능은 잃은 지 오래다. 앙상한 철골들만 흉물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50여개의 점포에서 현재는 단 세 점포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정자(노점상, 71) 씨는 “두 달 전부터 노점이 하나 둘씩 없어졌다”며 “갈 곳이 없어 여태껏 버티고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마침 손님이 와 “계란이 다 떨어졌는데 왜 들여놓지 않냐”고 묻자 “있는 것이나 팔려고…”라며 말을 아낀다.

저기 사람이 있다
 현재 유가족들은 사건 진상의 재조사를 요구하며 희생자들의 장례도 미루고 있다. 참사로 목숨을 잃은 고 이상림 씨 며느리 정영신(한강로, 37) 씨는 “망루에 불이 났을 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저기 사람이 있다’는 말”이라며 그때 기억을 떠올렸다. 연신 씨는 “‘정부의 유감이다’, ‘안타깝다’는 말은 사죄가 아니다”며 ‘끝까지 싸울 것’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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