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원(한국민족문화연구소 교수)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학교 주변의 지도를 그려 보라고 했다. 저마다 신나게, 혹은 다양한 지도가 나오리라 기대했던 필자는 의외의 낭패를 당했다. 처음에는 잠잠하더니 주어진 시간이 다가오자 여기저기서 “야, 야” 어깨를 툭툭 친다. "뭐 있노, 뭐 있노"수런수런 한다. 20여 분 후 결과는 높낮이 없던 그 수선거림과 비슷했다. 그 날 수업 주제는  ‘일상’이었다. 거의 천편일률적인 풍경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지도를 보고 아무 표정이 없었다는 점이다.

 
매일 학교를 오르내리면서, 학교 정문이 다가오면 필자는 얼굴이 벌개진다. 대학의 아우라보다 주차장을 위한 정문. 학교 안과 밖의 경계를 기어이 물고 들어온 상품의 매트릭스.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래도 숨기고 싶었던 한 줌의 빈틈마저 사정없이 발가벗겨졌다는 현실에 자조한다. 정문 수위실 옆 눈치 없이 버티고 있는 복숭아나무가 맥락이 없는 것인지. 연구실로 올라오는 길, 연두색 나무에 앉은 동박새나 황급히 도망가는 길냥이, 버려진(?) 언덕에 제멋대로 부화한 민들레 홀씨나 야생화에 힐금힐금 눈길을 주는 것을 제외하면, 한마디로 참 재미없다. 서로 앞을 막고 서있는 건물들에서 어느 시인이 전지작업을 하면서 발견했다던 ‘서로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나무의 미덕을 기대할 수 없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너무 고리타분한 노래인가? 아침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필자가 오랫동안 밟았던 새벽벌 이곳저곳의 이야기들을 꺼내려 하는 찰나, 자동차 경적은 울리고, 고개 들면 어김없이 사방을 막아놓은 시멘트벽에 갇히기 십상이다.
 
독립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2>의 오멸 감독은 이 영화는 제주도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이어 제주도를 ‘개인적으로 벗어나고 싶었지만 벗어날 수 없었던 지독한 공간’ 이라고 하면서 그 지독한  ‘공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예술가’라고 했다. 굳이 예술가의 꿈이 없다한들, 뭐 거창한 예술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내가 내 인생의 예술가라면, 내 청춘을 혹은 내 삶의 한 공간을 잡고 있는 이 공간-새벽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가. 보폭은 언제나 은행 달려가는 것보다 더 빠르게, 강의실과 강의실을 심호흡도 없이 달려야 한다. 필자의 시야는 경주마의 ‘레이스 강박증’을 앓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이 벽이 저 벽에게 하는 말’을 듣지 못한다. 모든 책임은 신자유주의 시장 탓이라 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그 시장이 만들어 놓은 스토리텔링을 나의 플롯으로 최적화시키는 데만 열연할 것인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우리학교를 걷는 나의 일상으로. 여기에서 내 청춘의 스토리텔링을 ‘발칙하게’ 만들어 보자. <스펙타클의 사회>의 저자 기 드보르(G. Debord)는 현대 도시 공간 질서에 대항하는 실천적 전략으로 심리지리(psychogeographie)와 전용(detournement)을 제시하였다. 심리지리는 기존의 지도로 대표되는 공간에 대한 추상적⋅기하학적 재현을 전복시키기 위해, 자신의 주관성에 기반해서 도시공간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것을 말하며, 전용은 기존의 문화적 요소들이 가진 의미를 파괴하고 새로운 의미구성을 하는 작업을 말한다. 오늘도 벽과 벽으로 구획된 캠퍼스의 지도를 따라 걷는 나에게 기 드보르의 작업을 주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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