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한 사람의 생애를 한 권의 책에 온전히 담아 낼 수 있을까. 평전(評傳)은 사전에서 밝히는 것 처럼 개인의 일생에 대하여 평론(評)을 곁들여 적은 전기(傳)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평전을 집필하는 작가의 주관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 나와 다른 시대를 살았던,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이의 삶을 타인이 평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반대로 동시대를 살면서 만나고 교류했던 인물의 삶을 평가하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런 의심들은 평전의 대상이 동시대를 살지 않은 인물이든 직접 만나고 교류했던 인물이든 공통적인 것이다.

그런 고민의 깊이가 커질수록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다. 대중들에게 선생은 최초의 공모제 독립기념관장이라는 직함보다 평전 작가로 더 유명하다. 지난 96년부터 한국근현대사의 인물들에 대한 평전을 써왔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2010년 발표한‘ 리영희 평전’은 리영희 선생의 서거와 함께 많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일왕부자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박열의 평전(1996년)을 시작으로 신채호, 김구, 함석헌, 장준하 등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거인’들의 평전을 내왔다. 최근에는 노무현, 김근태 같은 얼마 전까지 동시대를 살았던 대중 정치인에 대한 평전, 그리고 이승만에 대한 비판적 평론도 발표했다. 단행본으로 발행된 평전만21권이다. 지난 2008년 5월 6일부터는 거의 하루도 빠짐 없이 자신의 블로그인‘ 김삼웅의 인물열전’에 평전을 연재하고 있다. 한 인물에 대한 연재가 끝나면 이를 단행본으로 발간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대중들과 만나고 있다.최근에는‘ 진보적 민족주의자’ 몽양 여운형 선생의 평전을 연재하고 있다. 지금도 육필로 원고를 써서 아내와 자녀에게 타이핑을 부탁해 블로그에 연재한다고 한다.

올해로 칠순을 맞이한 선생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러나 열정과 기백은 더하면 더했지 여느 젊은이 못지 않았다. 세시간 가량 이어지는 인터뷰에도 흐트러짐 없이 견해를 밝혔다. 때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근현대사의 굴곡에 격정적으로 때로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청년들에 대한 조언으로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언론인으로서, 연구자로서 묵묵히 현대사 인물을 평가하는 충실하고 엄정한 기록자의 면모는 여전했다.

선생과 평전 작가로서의 역할과 평전의 의미,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최근의 국정원 사건과 박근혜 대통령의 역사인식을 비롯해 건국절 논란 등현대사 재평가 움직임 등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의견을 냈다. 인터뷰 말미에는 거꾸로 누군가를 평가하는 것을 소임으로 삼고 있는 선생을 후세의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길 바라는지도 들어봤다.

인터뷰는 지난 달 29일 경기도 남양주시에 자리한 선생의 자택에서 이뤄졌다. 그 날은 마침 국치(國恥)일이기도 했다. 일생 동안 독재·반민주,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과거사 등 민족 문제를 몸소 체험하고 연구해온 선생을 만나기엔 제법 의미심장한 날이었다.

△독서광이라는 소문은 들었는데, 집에 상상했던 것 보다 더 책이 많아 보인다.

-2011년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조사를 했을 때 2만 6천 여 권정도라고 들었다. 그 뒤로 5백권 정도는 더 사모은 것 같다. 어릴 때 부터 다른 욕심은 별로 없는데 책 욕심은 많았다. 용돈이 생기면 밥을 사먹을지 책 한 권을 사읽을지 고민할 정도 였으니.(웃음) 젊은 시절엔 교통비를 아껴 책 값에 보태려고 한 시간 넘는 거리를 걸어다니는 건 예삿일이었다.

▲ 선생의 서재. 선생은 2만 5천 권이상의 책을 보관 중이다.

△지난 2008년 독립기념관장에서 물러난 뒤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비롯한 각종 민주화, 역사단체와 직간접적으로 연을 맺고 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 근황이 궁금하다.

-독립기념관장 자리에서‘ 쫒겨난뒤’(선생은 2008년 3월 사임했다)로 공공기관에서는 안불러주더라. 책을쓰기엔 좋은 환경이어서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한달에 한 두번 정도 시민단체나 독립 및 민주화 기념 단체, 대학 등에서 가끔 강연을 하는 정도다.

 

△암울한 시대에 청년기를 보냈다. 청년 시절의 선생은 어떤 모습이었나.

-4·19직후 부산으로 건너가 생활하면서 대입 시험을 준비했다. 신문배달과 중국집 배달 아르바이트 등을하면서 대학 등록금을 벌었다. 결국 소위 말하는 서울의 명문 사립대에 합격했는데, 상경을 앞두고 하숙집 아들이 등록금을 들고 도망갔다. 영도 다리에 뛰어내릴까 고민도 하다가 입대했다. 전역 후 해남의 한 사찰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했는데,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공양을 내지 못해 6개월만에 나와야 했다.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깨어있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책과 신문을 많이 접했고 자연스럽게 언론에 관심을 갖게됐다. 장준하 선생이 계셨던 <사상계>신인 논문상에 가작으로 입상했고 기자가 되고 싶었다. 그렇지만 오적 필화 사건 등 여러 어려운 사정이 겹치면서 나를 기자로 쓰지 못하더라. 그러던 중 신민당 기관지인 <민주전선>으로 사상계의 모든 인원이 그대로 넘어갔다. 나도 함께 <민주전선>에들어갔고 이후 편집장까지 지내게 된것이다.

 

△20여년 간 야당의 기관지에서 활동했다. 번듯한 제도권 언론에서 활동하고 싶었을 것 같은데.

-지금이야 정당의 기관지가 선전물 수준으로 인식되지만 당시만 해도 야당의 기관지는 제도권 언론이 하지못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제도권 언론이 눈치 보느라 학생들의 반독재 성명에 침묵할 때 우리는 실었다. 언론이 제대로 된 비판과 견제를 못하는 상황에서 정론지 역할을 한것이다. 덕분에 남산과 이문동을 자주 왔다갔다 해야 했다. 그래도 나는 언론자유를 많이 누린편이다. 맞고 끌려가더라도 할 말은 하고 눈치는 안봤으니까.(웃음)

 

△평전을 쓰기로 마음 먹은 때가 언젠가.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30살 무렵이었다. 그 때 결심하길 60대가 지나기 전에 30권의 평전을 쓰겠다 마음먹었다. 일종의 사명감이었다.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고 왜곡된 것을 바로 잡는 일. 리영희 선생이 말했던 ‘1인분의 역할’을 다하고 싶었다.

 

△지금까지의 평전 인물 선정과 상반되는 이승만 평전을 내면서 ‘이승만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지 않는 점에 분노를 느꼈다고 밝혔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집필을 계획중인 인물이 있나.

-안두희와 김지하 시인. 백범 암살은 안두희 개인의 소행이 아니다. 독립운동의 상징이자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했던 김구 선생이다. 그의 죽음은 분단·친일·독재 세력의 합작품인 것이다. 안두희 배후의 세력을 밝혀내야 한다. 그를 오랫동안 비호해온 세력은 누구인지 어떻게 역사의 단죄를 맞이했는지 과정을 다루고 싶다. 김지하 시인의 초기 저항적 성향과 받았던 고초는 인정한다. 그렇게 불의에 저항하고 비판적이던 사람이 난데없이 생명 존중으로 전향을 한 것을 보면서 안타까웠다. 조선일보가 한 지식인을 타락시키는 과정, 생명사상에 탐닉하는 과정은 나치 집권기 독일의많은 현대사 연구자가 고·중세사 연구자로 전향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많은 젊은 세대들은 김지하를 잘 모른다. 그의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

 

△동시대인 중에 평전을 써보고 싶은 인물이 있나.

-한승헌 변호사와 함세웅 신부. 한 변호사는 유신과 5공 때 민주 인사의 단골 변호사였다. 아무도 민주 인사의 변론을 맡으려 하지 않을 때 끝까지 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길 수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많은 인사들은 그를 찾아갔다. 함세웅 신부는 한달에 한 번 저녁식사를 함께 먹는 모임의 일원이다. 가톨릭계 민주화 운동의 중추였다. 지금도 가톨릭계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수 많은 종교인 중 뜨거운 심장, 맑은 영혼을 지닌채 실천하는 모습은 내가 썼던 평전의 여느‘거인’들 못지 않더라. 지금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평전으로 다룬 인물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이 있나.

-특별히 정성을 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단재 신채호 선생. 일생을 자신만의 관점에서 민족사관과 독립운동 고대사 연구, 평전 저술에 헌신했다. 우리 역사교육이 옳다면 교과서에 조선혁명선언을 실어야 한다. 지금도 읽으면 가슴이 뛴다. 김원봉이 무장독립투쟁의 정당성을 고취하는 글을 단재에 부탁하자 단재는 한 달동안 여관 바닥에 엎드려 글을 썼다고한다. 약산이나 단재나 대단한 인물이다. 그 분들 덕분에 잃어버린 36년이 덜 쓸쓸 한 것 아닐까. 그런 점을 존경해 평전 뿐 아니라 전집도 냈다. 지금도 자료를 모으고 있다.

 

▲ 선생의 육필 원고. 선생은 여전히 손으로 원고를 집필하고, 아내나 자녀에게 타이핑을 부탁해 인터넷에 연재한다.

△단재 전집의 남북 공동을 출판을 시도하기도 했다.

-단재가 뤼순감옥에서 옥사할 때쓴 글들이 많은데 그 자료가 북한에 있다. 그 자료를 출판하고 싶어 북한의 학자들과 상의해서 남북공동 전집출판을 결의하고 직접 방문했다. 그런데 막상 방문하니 돈을 달라느니 이상한 얘기를 하더라. 그래서 아쉬운 대로 남한의 자료만으로 전집을 발간했다.

 

△지난 2010년 발간된 ‘리영희 평전’은 리영희 선생님의 서거와 함께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우연히 그분의 서거와 함께 책이나왔다.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에책 표지를 봤다. 함께 작업하는 동안지적도하고 격려도 해주셨다. 돌아가시면서 평전을 관속에 넣어 보내겠다고 선생의 사모님께서 말씀하시더라.

 

△리영희 선생의 정신 중 지금 대학생들이 되세겨 봐야 할 것이 있다면.

-선생은 1인분의 역할을 강조했다.지식인이라면 1인분의 역할을 해야한다. 대학생, 노동자, 교수, 정치인은1인분의 역할을 누구나 해야한다. 이것만 해도 역사가 정도로 흐른다. 역사의 물길을 제대로 흐르고 있다. 누구보다 열심히 자신의 역할을 한 분이 1인분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8월 15일을 건국절로 승격하자는 논의와 함께 이승만 전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 격상하려는 시도가 부쩍 늘어난 것 같다. 정권의 성향과 관계가 있다고 보나

-당연히 정치적인 시도다. 건국절을 주장하는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4.19 혁명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들에게야 말로 국보법을 적용해 처벌해야 한다.(웃음) 건국절을 인정하는 것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온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고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다른 나라의 보수는 자국의 정체성과 역사적 연속성을 중시하는데 우리의 자칭‘보수’들은 우리의 역사를 일제와 미군정에 갖다 붙이고 있다.

 

△지금까지 집필한 평전의 인물 중에는 선생께서 존경해왔고 오랫동안 교류해왔다고 밝히신 분들이 많다. 사사로운 감정이 반영돼 자칫 인물을지 나치게 미화하기 쉬울 것 같다.

-인간이기 때문에 친소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 관계나 자료의 엄밀성과 객관성 만큼은 결코 타협하거나 왜곡해서는 안된다. 나는 언론의 곡필 문제를 다룬 책을 4권이나 썼다. 자랑 하려는건 아니지만 아마 우리나라에서 곡필,필화, 금서, 위서를 쓴사람은 내가 유일할 것이다. 그만큼 사실을 왜곡하고 잘못 바라보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며 글을 쓴다. 누군가 그러더라. 김대중과 친해서 미화한거 아니냐고. 읽어봤냐고 했더니 안 읽었다더라. 제발 보고 얘기했으면 좋겠다. 장준하도 그랬다. 5·16쿠데타 직후 보였던 긍정적인 반응, 판단 착오 등도 그대로 드러냈다.

 

▲ 선생의 자택 거실에는 자료와 책들이 산 처럼 쌓여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지 반 년이지났다. 후보 시절부터 역사인식 들으로 논란이 많았다. 박 대통령의 역사인식과 국정운영에 대해 역사적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박 대통령은 반드시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해야 한다. 그 수준에서 머물면서 5년을 보내는 것은 본인이나 국민과 국가에 큰 불행이다. 역사는 큰 주기를 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자꾸만 거꾸로 가는것만 같아 안타깝다. 프랑스에서 시민혁명 후에 유행했다는 ‘변하면 변할수록 옛 모습을 닮아간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보인다는 점 정도인데, 야당과 반대 세력을 무시하는 것은 유신의 잔형이 그대로남아있는 것 같다.

 

△‘일베’등을 통해 대학생들에게 왜곡된 역사인식과 인물에 대한 평가가‘진실’인것 처럼 퍼지고 있다.

-강연에 나서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젊어서는 의롭게, 중년에는 정직하게, 노년에는 깨끗하게 살라’ 젊어서 의롭게 살지 못하면, 나이가 들고가족이 생기면 의롭게 살지 못 한다. 마찬가지로 중년에 정직하게 살지 못하면 노년에 깨끗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청년이 의롭게 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사회의 비극이다. 상황이 어려우니 어쩔 수 없었다는 ‘상황논리’에 빠지는 것도 경계해야한다. 망국기와 독재의 시대에도 당당하게 정도를 걸어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 한국사 대입 시험 의무화가 학생들의 역사 인식 재고에 도움이 된다고 보나.

-전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자국의 역사를 대입 시험이나 교육과정에 필수화하지 않는 곳은 없었다. 한국 사회도 역사 교육을 강화해야 하는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래서 대입시험에 한국사를 의무화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책으로 어떻게 가르칠지다. 뉴라이트식 역사교육이라면 안하느니 못한거니까.

▲ 선생이 자택에 보관중인 함석헌 선생의 휘호와 
선생이 한겨레 신문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모습

△후세에 누군가 선생의 일생을 평전으로 남길 수 있지 않나 싶다. 선생은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길 원하나.

-리영희 선생이 생전에 좋아했던 말이‘ 진실’이다. 나도 좋아하는 말인데,‘ 진실을 좋아하는 기록자’ ‘진실을 추구하는 기록자’ 이렇게 평가받고 싶다. 그래서 지금도 그런 신조로 글을 쓰고 있다.

 

선생은 오는 10월 25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에 방문할 계획이다.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홍범도 장군 서거 70주년을 추모해 카자흐스탄에 있는 장군의 묘소에 평전을 바치고 오기 위해서다. 장군은 자유시 사변으로 무장해제 당한 뒤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연해주와 카자흐스탄을 떠돌았다.그리고 카자흐스탄 어느 도시에서 극장 수위로 생계를 이어가다 쓸쓸히죽음을 맞이했다.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홍범도 장군은 이역만리 타지에서 쓸쓸한 죽음을, 독립군과 싸운 백선엽 장군은 영웅 대접을 받는 현실이 너무 비극적”이라며“ 이런 조국이 위기에 빠졌을 때 누가 희생할지 생각해봐야한다”고 말했다.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자의 군복이 문화재로 지정된다며 논란이 일고 있다. 어쩔 수 없다는상황논리 대신, 묵묵히 ‘1인분의 역할’을 하는 청년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시대다. 그래서 지금도 그 이상의몫을 하는 칠순의 선생이 여전히 현역으로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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