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배를 접는 시간>을 읽으며

2011년 1월 6일, 김진숙은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8년 전 노조지회장 김주익이 목을 맸던 그 자리였다. 경영이 어려우니 해고를 하겠다. 세월이 무색하게 회사의 레퍼토리는 한결같았다. 이번엔 4백 명. 전체 노동자 3분의 1에 달했다. 해고 계획안을 통보한 다음 날, 회사는 주주들과 배당금 잔치를 벌였다. 마구잡이로 해고통보서가 발송됐고, 노동자와 그 식구들은 힘겹게 맞섰다. 회사는 가진 게 많아 사원아파트를 쥐고 노조 탈퇴를 부추겼고, 용역업체와 경찰과 법원을 끌어들였다. ‘합법’과 ‘공권’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의 목줄이 죄이던 그 때, ‘희망버스’가 다다랐다. 당황한 회사는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경찰과 용역은 더 거칠어졌고, 디케는 천칭을 놓아버렸다. ‘노조 없는 세상을 만들자’던 회장은 마침내 국정감사에 출석했고, 간신히 노사합의서가 발표됐다. 해고자 94명의 1년 내 재취업이 합의됐고, 김진숙은 크레인에서 내려왔다. 309일 만이었다. 여기가 끝이어야 했건만 1년 후, 회사는 다시 술수를 부렸다. 합의된 재취업자들을 출근 세 시간 만에 무기한 휴직 통보하고 쫓아버렸다. 이에 젊으나 한 많은 노동자가 또 목을 맸다. <종이배를 접는 시간>은 이 3년에 대한 기록이다.

책은 옥빛이다. 표지색이 그렇고 속지에 들어간 유일한 색도 옥빛이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작업복에서 가져왔을 이 빛깔은 조선소가 있는 영도 바닷가를 연상시키고 그러므로배 만드는 노동자들의 눈물을 떠올리게 한다. 아니나다를까. 날개지에 박힌 짧은 저자들 소개에도 ‘눈물’이 넘치고,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이 물기는 마르지 않는다. 결정적 전환점인 희망버스를 기획한 송경동의 별명도 ‘울보 시인’인데, 크레인에서 내려온 후 김진숙이 ‘가장 고마운 사람’으로 그를 호명하며 또 운다. 모든 주어와 술어가 그렇게 다 운다. 젊으나 한 많았던 동료의 영정을 뒤로 추도사를 읽다가 엉엉 울고 마는 김진숙의 사진은 이 책에서 가장 뼈아픈 눈물이다. 명석한 판단과 거창한 대안은 이 눈물 앞에 해체된다. ‘작업복에 비쳐 옥빛으로 빛나는 눈물. 이 눈물은 약속이다’란 초입의 문장과 ‘물방울처럼 모여 강물처럼’이란 말미의 구절은 그렇게 순정한 수미상관을 이룬다.

그러니 <종이배를 접는 시간>에 등장하는 노동자와 그 식구, 희망버스 참가자, 그리고 저자들을 포함하여 이 책을 둘러싼 인물들은 하나같이 ‘눈물 흘리는 인간’이다. 이 눈물 흘리는 인간들은 그저 사력을 다해 운다. 부도덕한 세계 앞에서 한없이 절망하며 흘리는 눈물은 또한 한없이 무력하며 연약하다. 그러나 ‘통치자들의 척도들을 부수고 깨고 찢는 김진숙의 힘은 전지적 연약이라는 역설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윤인로의 지적(‘파루시아의 역사 유물론-크레인 위의 삶을 위하여’)처럼 이 울음은 힘이 세다. 가진 것 없는 노동자들은 희망버스를 타고 오는 이들에게 주려고, 배 만들던 그 거칠고 무딘 손으로 종이배를 접어 건넸다. 이것은 눈물 흘리는 인간의 경지일 것이다. 기실 그들의 절망은 피눈물이고 피울음 아니었던가. 그 핏빛을 옥빛 아래 내려놓음으로 먹먹한 서정과 아름다운 연대를 이룩했다. 그러므로 울음이라는 절망의 형식은 결국 연대의 언어였고 희망의 호출이었다. 눈물 흘리는 인간만이 기어이 ‘우리’와 ‘희망’을 말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무력한 당신께, 눈물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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