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600-700만 년 전, 네 ‘발’로 기어다니던 인류가 직립 보행을 시작하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 생물학적으로 직립 보행은 사족 보행에 비해 생존에 비효율적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직립을 함으로서 인간은 사족 동물들이 좀처럼 겪지 않는 발바닥 통증과 무릎 부상, 요통 을 달고다니게 됐다고 한다. 보행의 안정성과 속도를 잃게 됐고 뼈와 관절의 강도도 약해져 하중을 견뎌야 하는 척추까지 위험에 노출됐다.

하지만 어떻게 모든 것을 생존의 관점에서 평가하겠는가. 이 밖에 중요한 변화를 꼽는다면 아마 두 손이 자유로워진 점일 것이다. 두 손이 자유로워짐으로써 보다 섬세한 작업을 가능하게 했고, 각종 도구의 발명을 비롯해 창의성을 발휘하면서 자연스럽게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당장 우리의 일상에서 손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 없다. 수업시간에 열심히 손을 놀려 필기하고, 동시에 ‘카톡’을 날린다. 성년의 날에는 장미 꽃을 손에 들어야 한다. 편집국의 기자들은 이 시간에도 손가락 마디마디 저리도록 기사를 타이핑한다. 미국 순방길에서 여성 인턴의 허벅지를 ‘움켜줘’(grab)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손 부터 키보드로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왜곡하는 일간베스트 저장소(이하 일베) 이용자들의 손 까지. 일련의 사건들은 인류 문명을 꽃 피웠던 ‘손’이 얼마나 다양하게 쓰일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지난 24일, 광주광역시가 개설한 5⋅18 민주화운동 역사왜곡⋅훼손사례 신고센터는 개설 이틀 만에 천여 건을 훌쩍 넘는 사례가 접수됐다. 이 중 상당수는 일베의 역사왜곡⋅훼손사례 행태를 고발한 것이라고 한다. 어디 일베만의 문제겠는가. 과거부터 뉴 라이트를 비롯한 ‘자칭’ 보수 지식인들은 잊을만 하면 역사를 분탕질해 존재를 과시해왔다. 일베가 사회적 공분의 대상이 되기 전부터, 이들은 곳곳에서 광주의 정신을 훼손하며 일제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욕하고, 제주의 슬픔을 비웃으면서 밀양의 투쟁을 폄하해왔다. 이들은 독재를 옹호하고 민주주의를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여성을 비하하고 고인을 조롱한다.

일베에 접속해 맹렬히 ‘키보드’를 휘두르는 ‘전사’의 손은 주술과 비합리성의 전형이다. 근대를 탈주술과 합리성으로 규정한 베버의 규정에 미뤄 보면 이들의 모습은 전근대적 인간의 전형이다. 그릇된 믿음과 비뚤어진 종교관으로 십자군 원정에 뛰어든 수많은 중세의 무명 기사처럼, 합리성과 이성이 결여된 그들의 논리와 주장들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차라리 맹목적인 믿음을 향한 ‘기도(祈禱)’에 가깝다.

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일성했다. 역사 교육의 부재는 일베의 그릇된 역사 인식으로 표출됐다. 어찌보면 그들도 피해자다. 역사를 잊은, 역사를 잊게 만드려는 자들의 의도야 말로 불순하다. 그들이 정말 기도(企圖)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야 말로 ‘폭동’이라도 꾀하려는 것일까. 일찍이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는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고 말했지만 필자는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몰상식하고 반인륜적인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똘레랑스일까.

5월 광주의 비극을 폭동으로 둔갑 시키는 이들의 주장이 애초에 공론화된 것 자체가 한국 사회의 수준을 그대로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이다. 차라리 어느 책 제목처럼, 기도하는 그 손을 자르라 권하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다.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