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이들에겐 벌금을부과하고 강력히 진압한다,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이들은 모조리 연행한다, 병원을 폐업해야 하므로 직원들은 해고하고 환자들에겐 퇴원명령을 내린다. 지난 한 달간, 제주와 밀양과 진주에서 선보인 이 나라의 해법은 그 정도였다. 정치⋅사회적 갈등 앞에서 대화와 중재를 통한 해결이라는 선택지를 뽑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개는 그랬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먹부터 내지르며 진상을 부렸다. 촛불 집회, 용산 참사, 쌍용 자동차 파업이 그랬다. 한파에 물대포를 쏘았고, 생존권을 주장하는 철거민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며 특공대를 투입했으며, 저항하는 노조원들에게 테이저건을 쏘고 헬기를 동원해 최루액을 살포했다. 그러니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한전 직원에 맞서 옷섶을 풀어헤치며 맞섰던 할머니의 맨몸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그 날의 적나라는 국가의 폭력성이었다.

막스 베버는‘ 국가란 해당 사회의 유일한 합법적 폭력 기구’라고 말했다. 국가의 폭력성은일시적으로 채택되어 불가피하게 발현되는 게 아니라, 항시적이고 본질적인 작동 원리에 가깝다. 문제는 폭력의 계급성이다.‘ 국가’라는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신성(神聖)과 합리의 외피를 두르고 권좌의 최정점에서 강력한 기제로 작동할 수 있는 이유도 그 계급성에 있다. 근래 일련의 사건이 여실히 증명했듯, 국가 폭력이 향하는 곳은 언제나 힘없는 자들의 언저리였다. 더불어‘ 내부 식민지’로 전락한 주변부였다. 강자에서 약자에게, 주류에서 비주류로, 중심에서 변방으로. 이것이 국가 폭력에 내장된 제1의 원칙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국가는 늘 권력과 자본의 편이었고, 시스템은 탄력적으로 재편되며 이를 뒷받침했다. 권력과 자본이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법’ 자체가 지독히 폭력적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적자를 핑계로 멀쩡한 공공의료원을 폐업시키고, 거동이 불편한 93살 환자에게 손배소를 들이대는 이 치졸한 국가를 이해할 길이 없다. 민주화 이후 군대⋅경찰⋅국가정보원을 앞세운 노골적 국가 폭력이 법으로 치환되었을 따름이다. 이것은 선한 대통령이나 온정적인 도지사로 해결될 성질이 아니다. 군부 독재시절 금남로가 그랬듯 참여정부 시절의 대추리도 그랬다. 언제든지 주류의 질서에 도전한다면, 그들의 지시에 저항한다면 쫓겨나거나 끌려가거나 피 흘리며 쓰러질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투표 또한 답이 되지 못한다. 4년에 한 번,아주 잠깐의 주인 행세로 그치는 일은 목줄을 내어주는 격이다.

‘이 나라의 정치⋅사법제도의 본질과 그 고유한 편향성을 알고 있기에, 우리들은 법정이나 정치적 리더십에 의지할 수는 없다’고 말한 것은 하워드 진이었다. 그는‘ 합리적 조절자’로서의 국가를 기대하지 않았다. 소로에서 발원한‘ 시민불복종’을 뿌리 삼아 기득권에 반대하고 법과 싸우며 투표에 전부를 걸지 않았다. 스스로 주인이고자 연대하여 맞서 싸웠고 그것이 그를‘ 미국 현대사의 양심’으로 만들었다.‘ 정의로운 국가’는 허상에 가깝다. 법이라는 도구에 순종하고 투표라는 대의제에 내맡기는 한, 국가는 영원히 전지전능한 괴물 —‘리바이어던’ 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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