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후회하지 않아>에서 두 남자주인공은 게이 바(bar)에서 처음으로 만난다. 실제로 많은 동성애자들은 바나 카페에서 친목을 쌓기도 한다.동성애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레즈비언 바가 많다는 서면으로 갔다. 레즈비언 바나 카페는 대개 연락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구할 수 있는 정보라고는 ‘구 은하극장 주변 황색 간판’‘, 마리포사 맞은편’ 정도였다. 사전조사를 했다지만 레즈비언 카페나 바를 찾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있는 여성전용바가 모두 레즈비언바는 아니다. 이를 구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암시가 사용된다. 무지개가 있다든지, 성별을 나타내는 기호를 비트는 것 등이 그암호다. 암호를 알고 갔지만, 일곱 군데의 바는 모두 그 곳에 없었다. 어쩌면 필자가 발견하지 못한 것 일수도 있다. 상심하고 돌아가려는 찰나, 레즈비언 바가 많다는 골목 사이에서 기적적으로 바를 하나 발견했다. 바는 지하 깊숙이 숨어있었다. 바의 입구에 가기 위해서는 지하 속 코너를 돌아야 했다. 바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운터가 나왔다. 세 명의 여인은 필자를 보더니‘어떻게 오게 됐는지’물어봤다. 카운터 쪽에서는 바의 안을 볼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야만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카운터와 바는 철저히 분리돼 음악 소리도,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성소수자들이 모이는 바는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만들고,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만끽하게 한다. 바라는 밀실 안에서 그들을 위한자유가 존재한다. 성소수자가 광장으로 나오는 순간, 그들은 시련을 맞게 된다. 구원받아야 할 정신‘병자’취급을 받기도 하고, 세상에서 가장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보유한 사람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들은 곧 편견에 가득차고, 비인권적인폭력을 마주한다. 성소수자가 주체적으로 결정한 성적 자기결정권 역시 인정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들에게는 그냥 밀실에 있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인권 보호를 위해 광장으로 나섰던 성소수자들. 거기 그들이 바라던 광장은 없었고 폭력만 존재했다. 성소수자들이 꿈꾼 광장은 <광장> 속 이명준이 꿈꾸던 광장과 비슷하리라. 이명준은 유토피아를 찾아 바다로 몸을 던졌다. 모두 광장을 찾기 위해서는 몸을 던져야만 할까.

 

그들이 바라는 광장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하면 만들 수 있는 광장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다.성적 자기결정권을 무시하고, 다수인 이성애자가 가지고 있는 성에 대한 생각을 밀어붙이는 것은 민주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폭력적이다. 성소수자는 자유로운 광장을 가질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광장을 가질 권리가 이성애자에게도있다. 이성애자는 성소수자와 광장에서 자유롭게 만날 권리를 가지고있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만을 위해서 자유로운 광장을 만들자는 것이아니다. 이는 모두를 위한 일이다. 그자유로운 광장은 성소수자 뿐 아니라 인간의 권리가 가장 우선시 되는공론장이 될 테니까. 성소수자와 광장에서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는 그권리, 여러분이 어떤 광장을 꿈꾸는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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