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당차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것이 좋은 의미였건 나쁜 의미였건 자신감이 넘쳤고 무엇에든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적극적이던 내 모습이 점점 소극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 소심해지기까지 했다. 주변의 상황들에 눈 감고 입을 닫았다.

대학 진학 후 1년 뒤에도 나 자신에 큰 불만은 없었다. 눈을 감고 입을 닫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노래를 듣던 중 한 가사가 귀로 들어와 머릿 속에 박혔다. ‘지루한 날을 덧없이 흘려보내며 넌 아무생각 없이 시간을 때우고 있지. 아무도 시작하라고 말하지 않지’ 즐겨 듣던 노래였지만 그날따라 왠지 다르게 들렸다. 뭔가를 해야 했고,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변화의 중심에는 어린 시절 적극적인 모습의 내가 있었다.

당당한 모습으로 변하고 싶어 들어온 신문사, 그러나 처음의 각오와는 달리 점점 지쳐갔다. 학업과 병행하는 신문사 생활에 체력적으로 힘든 것은 견딜 수 있었다. 문제는 기획과 취재, 그리고 기사를 쓰는 단계에서 한 살 어린 동기들보다 뒤처진다는 생각이었다. 만족스러웠다고 느낀 날에도 선배들의 타박이 이어졌다. 스스로 무능력하다 여겨졌고 그것은 나를 가두는 족쇄가 됐다.

하루하루 무능한 모습에 자괴감에 빠져있던 중 앤디 헌트가 쓴 책을 읽다 ‘이차적 무능력’이라는 개념을 알게 됐다. 일차적 무능력은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이차적 무능력은  ‘무능력하진 않지만 더 좋은 방법을 찾으려 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 안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정확한 자기 평가가 없다는 것, 그것 또한 무능력의 일부였다. 일차적으로 무능한 나였지만 적어도 이차적으로 무능력 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나는 정확한 자신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부족함을 알고 주간지를 챙기고 책을 읽는 등의 노력을 한다. 그리고 이전과 비교해 더욱 성장한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런 확신이 드는 순간부터, 나 자신을 위해 신문사에 남아야 했다. 능력이 있건 없건, 그것은 나중의 문제였다. 스스로가 변하면 참신한 기획을 만들고 사회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기사를 쓸 수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그런 믿음으로 앞으로의 신문사 생활에 임할 것임을 ‘낙수’를 앞둔 자리에서 마음에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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