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의 줄타기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2. 나는 200% 감정적인 사람이다. 3.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
 
이 세 가지 명제 아래 계속된 20년하고도 7개월동안의 삶은 비겁했다. ‘나는 이성적일 수 없으니 여기까지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라며 쉽사리 포기해버리곤 했다. 부대신문에 입사하고서도 그 악순환은 끊어지지 않아서 잘못된 취재를 고칠 고민을 하기보다는 포기하고 자위했다. 그러던 중, 한 번의 평가회의가 내 견고한 벽을 깨게 했다. 이전에는 내 기사에 대한 비판이 나올 때마다 귀를 닫고 넘어가곤 했었다. 그런 내가 문득 스스로 만든 현실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계속 도피하면 변화는 없을 거란 걸 깨달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나에 대해, 기자에 대해, 신문사에 대해 고민했다.
 
신문기자야말로 이성이 필수적인 직업이다. 물론 문제의식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고 공감할 감성이 필요하지만, 이성 없는 비판은 발악일 뿐이다. 진정 문제의식을 느끼고, 고쳐져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면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 그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어떤 근거가 필요할지 깊이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내 문제는 그것을 공감하는 데에만 그쳤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최선을 다해 치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취재를 하다보면, 이 사회 전체가 분명 문제는 있지만 ‘정확히 알 수도 없고 어쩔 수도 없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냉정히 생각하다 보면 어딘가에 문제의 핵심적인 이유가 있고 거기에 해결책도 있을 것인데 말이다.
 
내가 굳힌 ‘감정적’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지금껏 원하는 것과는 다르게 살아왔다. 한번쯤 ‘내가 틀리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했다면 좋았을 텐데, 깨닫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고 쓸데없는 고집도 길었다. 그렇지만 늦게나마 내 세계를 깰 기회를 주고 기다려 준 곳이 바로 신문사가 아닌가. 아침에 눈뜨자마자 ‘아, 취재!’하고 한숨을 쉬게 하는 신문사에서 차마 떠나지 못하는 건 더 배우지 못했고, 보답도 한 적 없다는 미련이 아닌가 싶다. 진정한 기자로서의 생활을 앞둔 지금, 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은 신문사가 나를 기다려준 만큼 누구라도 인정할만한 열정과 노력으로 보답하는 것이다. 그 열정으로 냉정한 이성을 찾고 세상을 올곧게 바라볼 수 있는 기사를 쓸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