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회 부대문학상 소설 부문 당선작

2011년 3월 17일

있잖아 나나.
하루는 네가 나를 떠나는 꿈을 꿨어. 그것은 마치 매일 아침 찾아와 지저귀는 새가 더 이상 오지 않는 것 같았어. 어쩌면 나나도 그런 기분 알 거야. 예전에 앵무새를 키웠다고 했었잖아. 그런 앵무새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그런 기분이었어. 그래서 나는 새벽에 일어나 애완동물가게엘 갔어. 그리고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렸던 거야. 급하게 나갔던 탓에 무지하게 추웠어. 3월의 아침은 나에겐 전혀 상냥하지 못했어. 나는 그냥 벌벌 떨면서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런데 나나, 어쩌면 바로 그때였는지도 몰라.

*
  그것은 빛나에게 온 명찬의 마지막 연락 중 일부였다. 하나의 부고와 같은 글을 남기고 그는 떠났다. 하지만 빛나를 한사코 나나로 부르던 명찬의 연락은 몇 주가 지나지 않아 다시 듣게 되었다. 지이이잉. 빛나는 이미 지웠지만 익숙한 번호가 핸드폰 액정을 깜빡이는 걸 보자 마치 깜빡이는 보행 신호등에 막 도착한 기분이었다. 마침 직장동료들과 점심식사 중이던 빛나는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바라보는 타인들 앞에서 등 떠밀려 건널목으로 발걸음을 내딛듯 손을 뻗었다.
  “응, 그래. 무슨 일이야?” 빛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이런 경우를 예상 못한 건 아니었지만, 그 배경이 은근한 라이벌 관계인 직장 동료들 앞에서는 아니었다. 말단 인턴기자 생활에서 정식 기자가 되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고비가 눈앞에 버젓이 밥을 먹고 있었다.
  “나나씨 인가요?”
  “왜 그래? 다 알면서. 나 지금 밥 먹고 있는 중이야. 나중에 연락해.”
  “아니, 잠깐만요. 저는 명찬이 아닙니다. 명찬이 형 성찬입니다.” 성찬이라고 밝힌 상대의 조급함은 빛나 수저에 뜬 밥알의 수보다 많아 보였다. 빛나는 직장 동료들에게 중요한 전화라고 자리를 옮겨 핸드폰을 고쳐 들었다. 그렇다고 점심 피크시간의 광화문대로도 조용한 건 아니었다.
  “네, 말씀하세요.” 빛나는 1년을 넘게 사겨왔던 명찬에게 쌍둥이 형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괜한 오해를 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쌍둥이라 목소리마저 비슷하거든요.” 그리고 전화기 너머로 긴 한숨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그것은 언젠가 TV에서 봤었던 잠수를 하기 전의 그것과 같았다. 빛나는 다음에 들을 말이 바다 속 수압과 비슷한 내용이란 걸 직감했다.
  “나나씨, 동생 명찬을 찾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걸요.” 바다 속 수압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일단 만나서 말씀드릴게요. 무리한 부탁이지만,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신가요?”
 빛나는 그렇게 성찬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전화를 끊은 빛나 옆으로 거대한 컨테이너 트럭이 지나갔다. 그 굉음 속에서 시원하게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은 빛나였다.

*
  그런데 나나, 어쩌면 바로 그때였는지도 몰라.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 무슨 마트였던가? 애완동물 코너 앞이었지. 맞아 나나. 너는 그때 마트 바구니를 내려놓고 토끼 사진을 찍고 있었어. 너랑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커다란 DSLR을 쥐고 있었지. 그런데 그거 알아? 내가 그때 얼마나 망설였는지 말이야. 너에겐 너와 말 걸고 싶어서라고 나중에 둘러댔지만, 사실 난 그날 그 토끼를 사려고 했었거든. 나는 나나의 취미생활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 한눈에 봐도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아 옷을 사기보다 DSLR을 먼저 샀을 것 같았거든. 나는 그래서 마트를 두 바퀴나 더 돌았어. 그러는 동안 오늘만 할인한다는 9,900원짜리 와인, 3팩에 만 원 하는 초밥세트 그리고 저녁 마감 할인을 하는 치킨을 사버렸지 뭐야. 나나, 너두 생각하겠지만 정말 신기하지 않아?

*
  성찬을 만나기로 한 신촌의 카페에서 빛나는 명찬의 편지를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앞에 그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성찬이 말했다.
  빛나는 전혀 안녕하지 못했다. 애증의 명찬의 얼굴이 빛나의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성찬인 걸 알고 있었지만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TV에서 봤었던 쌍둥이가 각자의 방에서 같은 종류의 카드를 선택하는 손에 생각이 미쳤던 빛나는 어쩌면 성찬에게 반쯤 먹은 물 컵을 뿌려도 좋을까 생각했다.
  “네, 안녕하세요.” 생각과는 다르게 이성적으로 대답했다.
  학창시절 자주 오던 카페는 여느 때와 같이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특히 빛나는 바흐의 교향곡을 좋아했다. 의자에 앉은 성찬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갑작스레 불러내서 죄송합니다.”
  “아뇨. 그보다 만나서 해야 할 이야기라는 게 뭐죠?”
  물컵을 내려놓는 성찬의 손에 뽀얀 먼지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빛나의 눈길을 의식한 성찬이 자리에 일어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강의를 마치고 급하게 오는 길이라 서요. 손만 씻고 오겠습니다.” 빛나는 가볍게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생각과 달리 성찬은 명찬과 닮았다는 생각이 크게 들지 않았다. 머리스타일, 억양, 복장 그리고 돌아서서 걸어가는 걸음걸이가 달랐다. 특히 밤색 정장은 전체적으로 상당히 진중한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었다. 명찬이 제아무리 어깨에 힘을 준 다해도 따라 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빛나는 가만히 물 컵을 두 손으로 집어 들었다. 손바닥 사이에 남아있던 냉기를 완벽하게 몰아냈을 즈음 성찬이 돌아왔다.
  “이곳, 분위기가 좋군요.” 성찬은 주위를 둘러보며 이야기 꺼냈고, 빛나가 시선을 그의 시선을 채 따라가기 전에 이런저런 다른 이야기들을 꺼냈다. 그는 달변가였다. 아마 대학 강단에서 꽤나 인기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빛나는 식어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만나서 하겠다는 얘기가 뭐죠?” 빛나의 억양은 감정이 없는 그냥 하얀색이었다. 성찬은 당황하는 듯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빛나는 성찬이 이번엔 무언가 중대발표를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잠시 후 빛나가 들은 성찬의 목소리는 빛나와는 다른 검붉은 색이었다.

  “정말, 사실인가요?” 빛나의 목소리에도 색깔이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네, 사실입니다. 너무 놀라실 것 같아서 그리고 아마 다른 질문도 많이 하실 것 같아서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던 겁니다.” 오히려 성찬은 시험을 마치고 나온 아이처럼 몇 분 전과는 다르게 안정을 찾은 듯한 목소리였다. 어쩌면 그 전 몇 마디의 말 속에는 무언가 마법이 있어서 성찬에게 있던 불안감이 빛나에게 넘어간 것 같아 보였다.
  “정말 믿지 못하겠어요. 어떻게 그 동안 숨겨올 수 있었죠?” 빛나의 입을 떠난 물음표들에 성찬은 한숨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빛나를 측은한 듯 눈으로 쳐다보았다. 빛나는 그런 시선이 싫었고, 무엇보다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 왜 이제야 동생을 찾아요? 그동안은 뭐 하고 있었어요?” 말이 채 끝마치기 전에 빛나는 지난 과거가 생각이 났다. 한 번도 가족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한 적도 없고, 명절 때조차 부모님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단지, 아는 것이라고는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다는 것과 쌍둥이 형 이야기가 나오면 아주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사실 아버지는 몰라도 저는 찾으려고 이곳저곳 수소문해보았습니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동생 친구들조차 동생의 연락처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단지, 그냥 잘살고 있다는 것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동생이 친구들에게 단단히 얘기해둔 모양이더라구요. 그래도 잘살고 있다니 언젠가는 웃으며 보는 날도 오지 않을까 해서 무리해서 찾는 일은 그만두었습니다.” 성찬의 목소리와 눈빛엔 정말로 걱정하는 사람 특유의 기운이 스며들었다가 나가는 것 같았다. 빛나는 이제는 식어버린 커피잔을 들어마시고 찻잔에 놓았다. 카페에서 CD를 교환하는지 조용한 내부에 그 소리가 더 신경질스럽게 느껴졌다. 빛나의 행동을 눈으로 쫓던 성찬이 말을 이었다.
  “아마 동생도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아무리 제가 형이라지만 불과 몇 초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이런 저랑 항상 비교하시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왔으니…. 동생과 가장 가까운 분이니 부탁드립니다. 혹여나 동생이 나쁜 선택을 하면 어쩌나 항상 걱정입니다.”
  “나쁜 선택이라뇨?”
 “아닙니다. 명찬이 물건이라도 남은 것이 있으면, 짐작이라도 할 텐데…. 혹시 집에 다이어리라던가 노트북이라도 있다면 한 번 살펴봐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그날, 너는 정말 우스꽝스러웠어. 마트에서 처음 장을 본 사람처럼 혼자서 들지도 못할 만큼 샀으니까 말이야. 토끼가 들어있는 케이스를 손에 들고, 바닥에는 쇼핑했던 물건을 담아둔 박스를 보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지. 다 들지도 못하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샀었던 걸 거야. 어쩌면 너의 그런 모습에 반했는지도 모르겠어.
  있잖아, 나나.
  그날 너를 내 차로 데려다 주며 내가 사려 했던 토끼이야기를 꺼내며 친해졌잖아. 그런데 사실 나는 마트 2층에 가면 무료배송 해주는 코너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너의 어떤 점이 나를 그렇게 이끌었을까? 그리고 너는 나의 어떤 점이 좋아서 처음 보는 나를 너의 원룸으로 흔쾌히 들여놓았을까? 나나가 토끼에 열중하는 동안 충동구매 했었던 와인이랑 초밥세트가 우리의 첫 식사였던 것은 정말 신기하지 않니? 마치 충동구매의 매니아가 되어버린 것 같았어.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 충동구매 목록에 나나도 적어야 하나 고민했으니 말이야.

*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빛나는 성찬이 했던 말을 다시 정리해 보았다. 그러니까 명찬은 어릴 때부터 늘 모든 것에서 우수한 성찬과 비교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쌍둥이라지만 성격은 판이하게 달라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서로 등을 지고 있었다고 했다. 빛나는 성찬이 학창시절 우수한 성적과 교내외에서 받아오는 상장들의 무게만큼 명찬이 받았던 고통 또한 현실적인 무게로 다가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같은 학교에서였으니, 집과 학교 모두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결국 성찬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진학하여 지금 어린 나이에 교수직을 맡고 있고, 명찬도 진학은 그럭저럭 하였으나 지금은 입시학원 강사가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난폭운전을 하는 지금 이 버스처럼 명찬의 진로에 급제동이 걸린 것은 다른 문제였다.
  빛나를 만나기 1년 전의 일이다. 성찬은 강의하는 클래스의 새내기 여대생과 공모전 주제를 도와주다가 친해졌다고 했다. 다른 교수와 공동으로 맡게 된 정부에서 따온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밤늦게 남아있을 때, 그 여대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요즘 고민이 있는데 상담 좀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성찬은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어서 아직 학교 근처면 지금 잠깐 볼 수 있냐고 했고 그렇게 성찬과 여대생은 만났다. 밤늦은 시간이라 교수실로 부르기도 이상해서 밖에서 만나자고 하였는데 오히려 그게 문제를 불러왔다고 했다. 성찬은 이 부분을 여러 번 말하면서 ‘그때 자신이 그렇게만 했더라도 동생과 좀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라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때만 해도 빛나는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미지수였지만, 빛나가 생각하던 어떠한 미지수 항에도 성찬의 다음 이야기들이 들어있지 않았다. 아니 성찬의 다음 말은 아무리 구부려 넣으려 해도 아직 빛나의 이해범위 속에서 삐쳐나가 있는 부분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여학생이랑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주위가 오픈된 치킨집으로 갔습니다. 시간도 시간이고 주위의 눈도 있고 해서, 카페에서 보는 것보단 치킨집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이 한다는 말이 저에게 이성으로 관심이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당황하였죠. 저는 그런 의도로 그 학생을 대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저의 의도하지 않은 어떤 부분이 학생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했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탁자 위에 맥주잔이 3개쯤 되었을 때, 갑자기 펑펑 우는 거에요. 그래서 늦었으니 집에 가자고,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 하고 앞으로도 웃는 모습으로 보면 좋겠다고 했어요. 밖에 나오니 바람이 차더군요. 술 먹은 학생을 그냥 보내기도 그래서 그날 동생을 불렀습니다. 동생이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지 저랑은 다시 어느 정도 관계가 회복되었거든요. 그런데 그날 동생이 집에서 또 뭐 안 좋은 소릴 들었지 표정이 어두웠어요. 그래도 지금 상황을 솔직히 이야기하고 저를 집에 데려다 주고 여학생도 사는 아파트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잠실에 그 학생의 아파트가 있는데 가는 길에 저희 집이 있었거든요.”
  “설마, 그런 건 아니겠죠?” 성찬의 얘기하는 도중에 빛나가 끼어들기도 했었다.
  “저도 며칠 후에나 어떻게 된 건지 알게 됐습니다. 그것도 학교 측을 통해서요. 제가 그 여학생이랑 성관계를 맺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처음에는 정말로 화냈습니다. 그런데 의심 가는 부분이 있더라구요. 그날 밤 동생은 돌아오지 않았으니까요.”
  “아….” 성찬의 말에 빛나는 짧은 탄식이 나왔었다. 빛나는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성찬이 알아본 결과 교내에선 이미 자신과 그 여학생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진 상태였고, 그 소문의 근원은 여학생과 명찬이 아침에 모텔에서 나오는 것을 본 다른 학생의 입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성찬은 교수로서 입지를 지키기 위해 단호하게 모두 앞에서 아니라고 이야기했고, 여학생도 교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밝혀 사건이 일단락 지어지는가 했다. 하지만 소란의 책임을 물어 성찬은 국가 프로젝트에서 제외되었고, 남 말하기 좋아하는 무리 속에서 여학생은 휴학을 선택했다.
  끼이익-
  버스가 또 급정거를 했다. 빛나도 생각을 접고 버스에서 내리며 그동안의 명찬을 생각했다. 어떠한 말이든 명찬의 입을 거쳐서 나오면 그 언어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리얼리티를 빛나에게 부여했고, 언제나 유쾌한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 나이 차이가 나긴 했지만 막상 부딪혀보니 문제가 아니었다. 빛나는 그때부터 무엇을 하던지 명찬과 함께했고, 명찬은 옆에서 항상 힘이 되었다. 결국 빛나는 대학 3학년 때부터 명찬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신문방송학과 학생이던 빛나에겐 전공과는 다른 연극배우라는 꿈이 있었고 학교 동아리를 통해서 무대에도 여러 번 올라갔다. 명찬은 그런 빛나를 항상 응원하고 연습하는 걸 도와주었다. 또한, 오디션이 있는지 알려주고 매번 떨어지는 오디션장에 데려다 주었다. 명찬과의 생활은 빛나에겐 삶의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명찬은 눈에 띄게 달라져 갔다. 커다란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함께 사는 빛나는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명찬의 입에서 올라오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결락된 것이 많았고, 밋밋하고 깊이를 잃어갔다. 항상 활기차던 명찬은 꼭 다음 페이지가 없는 동화책처럼 종종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빛나와도 사소한 것들로 말다툼이 잦아지고 그리고 어느 날 돌연 사라져 버렸다. 빛나의 인생도 그 시점부터 본선을 벗어난 열차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다. 그곳에 있어서 이렇다 할 출구는 없었다. 연극배우라는 꿈은 마치 심해에 사는 물고기와 같아서, 현실이라는 수면에 올라왔을 때에는 꿈과 현실의 수압차이에 의해 원래의 형태를 잃어버렸다. 취업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빛나는 간신히 지금의 신문사 인턴직을 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빛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컴퓨터부터 켰다. 그리고 정신병원에서 퇴원하던 중 결국 인생을 비관해 자살한 여대생의 신문기사를 찾아보았다. 자살률 1위의 국가답게 규모가 작은 지방 인터넷 신문에만 올라와 있었다. [20대 하xx(여대생) 삶을 비관해서 자살] 그 내용은 고인에 대한 것보단 현 정부의 복지시책의 문제점만을 나열하고 있었다. 인터넷 창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빛나는 방 한쪽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쌓아둔 명찬의 물건에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명찬이 두고 간 노트북의 전원 스위치에 손가락을 올렸다. 평소 자동 로그인 시스템을 쓰던 명찬이라서 전자메일을 확인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최근에 온 스팸메일과 카드대금과 같은 전자 영수증 아래에 다음과 같은 메일이 있었다.

[보낸 이] 하현정       [제목] 오빠 저 너무 힘들어요.    [날짜] 2011-01-05
명찬 오빠.
왜 저를 자꾸 피하는 거에요? 그동안 잘 만나 왔잖아요.
다른 여자라도 생긴 거에요? 아니면 저번에 했던 말 때문에 그래요?
맞아요. 처음에는 성찬 교수님과 똑같이 생겨서 대리만족으로 만났던 거 맞아요.
처음에 오빠랑 잘 때도 사실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날 그렇게 저랑 관계를 맺은 것은 오빠도 잘못한 거잖아요. 마음 같아서는 요양원이나 병원에 더 있고 싶어요. 그런데, 집에서 더 이상 비용을 내기 어렵다고 퇴원하래요. 다음 주 수요일 저 병원 퇴원해요. 꼭 만나러 와주세요. 아니면 정말 그때 교수님과 오빠의 일을 다 말하고 다닐지도 몰라요. 그만큼 지금 힘들어요.

  빛나는 정신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달력을 보고 날짜를 계산해보니 명찬이 갑자기 사라진 날짜가 1월 12일. 여학생이 퇴원하는 날이었다. 빛나는 급하게 명찬의 마지막 편지를 찾아 서랍을 뒤졌다. 그리고  한 번 더 자세히 읽어나갔다.

*
  있잖아, 나나. 나는 이때까지 항상 너에게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 더 잘해주려고 노력했는지 몰라. 나나는 나에게 모든 것을 보여 줬는데, 난 그럴 수 없었어. 해맑은 나나의 밝은 표정 앞에서 난 조금 위축되었는지도 모르겠어. 나 오늘은 결심을 하려고 해. 이렇게 달랑 편지만으로 이야기해서 미안하지만 나를 잊어줘. 충동구매를 했던 것처럼 충동적으로 헤어지는 건 아니야. 늘 말하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던걸. 그리고 이젠 더 이상 형이랑, 가족에게도 피해를 주고 싶지도 않아.
  더 이상 나나라고 소리 내어 부르지 못하는 게 제일 아쉽다니…. 나는 끝까지 나만 생각하는 그런 놈 인가봐. 우리가 사는 방 보증금은 어차피 나나 앞으로 바꿔났으니 알아서 처리하렴. 항상 보고 싶을 거야.

*
  빛나는 망연자실 해졌다. 이제야 사건이 제대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렇다. 현정이라는 여대생은 자살을 한 것이 아니라, 명찬이 죽인 것이다. 그리고 명찬은 잠적했다. 어쩌면 성찬은 정말 동생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교수라는 자리를 안정적으로 지키기 위해 명찬을 찾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명찬이 여대생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여대생의 자살의 진실에 대해서도 말이다. 빛나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자신이 명찬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명찬의 사랑에도 의심을 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보다 명찬을 더 믿고 있었고 모든 것을 의지하던 하나의 종교였다. 세상은 어느 한구석조차 의미 있는 빛깔을 보이지 않았다. 빛나는 자신이 집시가 된 것 같은 생각을 했다. 이전에 동아리에서 현대인의 삶을 이리로 저리로 방황하는 집시의 생활로 극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빛나가 그 집시의 역할이었다. 당시 선배들과 관중들에게 극 중 역할을 잘 소화해 낸다고 칭찬을 받았는데, 왜 하필 지금 그 생각이 떠오르는지 빛나는 더 슬퍼졌다.
  빛나에겐 모든 일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었고 소리 내어 울고 싶었지만 울음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깊고 깊은 슬픔에는 눈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조차도 없었다. 빛나는 전자메일을 지웠다. 그리고 성찬에게 남은 물건이라곤 옷가지 몇 개밖에 없다고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더 이상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면 제대로 서 있을 자신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주쯤 지났을까. 성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빛나씨, 이런 일로 연락드려서 죄송하지만 명찬이 소식입니다. 연락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성찬의 목소리는 어딘가 한 땀 미끄러져 있는 것 같았다. 빛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려 했지만,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었다.
  “네, 말씀하세요.” 빛나의 목소리는 탑을 쌓아서 하나씩 빼는 게임인 젠가의 마지막 도막을 뺄 때처럼 위태로웠고, 금방 무너져 내려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명찬이 손목을 긋고 자살시도를 하였답니다. 지금 병원으로 옮겨져 있는데, 혼수상태입니다. xx병원입니다.”
  “알겠습니다. 이제 연락 안 해주셨으면 하네요.” 빛나는 어렵게 용기를 내서 이야기했다. 지금 빛나에게 중요한 것은 경쟁을 뚫고 취업을 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또 한 번 무너진다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다. 절대 병원으로 향하지 않을 것이라는 빛나의 다짐은 이틀이 되지 못해 무너졌고, xx병원으로 향하는 혜화로 향하는 4호선에 발을 올렸다. 명찬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깨진 유리 조각들 위로 비춰지는 사물처럼 조각조각 비집고 들어오는 추억들까지 다 막을 순 없었다.
  병실엔 다행히 명찬의 가족들은 없었다. 괜히 자신에게 이것저것 물어본다면 난감할 것 같아서 더 찾아가길 꺼렸던 빛나였다. 명찬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평소의 그 유쾌한 모습은 다시는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빛나는 명찬의 머리칼을 한 번 쓸어 넘긴 후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잘 지내요. 나에게 거짓된 모습을 보인 건 밉지만, 그래도 그동안 고마웠어요.”
  얼마 전에 읽었던 책이었던가? 그 책의 마지막 문장은 그녀가 누구를 만나고 어딘가로 발걸음을 뻗어도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우리는 그동안 사랑을 생산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단지 소비하고 있었던 걸까?] 빛나가 생각하는 명찬과의 관계는 후자였다. 우리는 단지 서로에게서 흘러나온 감정을 적절히 음미하다 소비해 버렸다고, 그걸로 끝이라고 빛나는 생각했다. 병원을 나온 빛나의 눈에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 흘러내렸다. 앰뷸런스가 주차된 병원 앞은 희뿌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검정색 장우산을 깊이 눌러쓴 그녀는 조용히 흐느끼며 생각했다. ‘그래, 이런 결말이라도 괜찮아. 시간이 조금 흐른다면 다 괜찮아질 거야. 내 인생의 다음 장을 넘기기 위해서 단지, 비가 내리는 것뿐이야. 무대에서 다음 막을 위해 내려오는 그것처럼….’ 빛나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여기까지 찾아올 때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항상 그렇듯 현실은 더욱 가혹했다. 무대의 막은 쉽게 올라갈 것 같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시간의 흐름은 어딘가로부터 툭 하고 끊어져 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인파 속을 걸어 다녔다. 평소라면 비껴가던 물웅덩이도 더 이상 그녀를 제지하지 못했다. 물웅덩이 위로 수채화처럼 흘러내린 빛나의 모습 속에 더 이상 명찬을 찾을 수 없었고, 잠시나마 망설였던 자신이 미웠다. 도망치려 할수록 명찬과의 추억은 비처럼 집요하게 그녀에게 쏟아 내렸다. 각진 모퉁이를 비껴 돌아 육교를 건너고 암갈색 담장 길을 지날 때에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는 속도로 따라붙었다. 간혹 물방울이 얼굴로 튀기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구부러진 우산 손잡이를 더욱 꽉 쥐었다. 빛나에게 그 물방울을 자신에게 평소 명찬의 첫마디처럼 느껴졌다.

  ‘있잖아, 나나 … .’

  빛나는 대답하고 싶었다. 입을 열었지만 그 소리는 어떠한 단어도 만들지 못하고 비와 함께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흘러내렸다. 무수한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우산을 노크했지만, 문을 등지고 있는 사람처럼 그녀의 꽉 쥔 손은 완고했다. 바닥은 쏟아진 명찬의 말과 그녀 입을 떠난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닌 단어들로 섞여 있었다. 빛나는 그것들이 씻겨 내려가는 반대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마침 보행등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 신호가 끝나갈 때쯤 빠르게 건넌다면 더 이상 어떠한 것도 따라붙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마치자마자 바로 발을 옮겼다. 또각또각 차분히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때었다. 무대의 막이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그래, 반대편으로 건너가면 다 괜찮을 거야.’ 막은 어느새 거의 다 올라가고 있었다. 우산을 움켜잡아 하얗게 질린 손에도 피가 돌기 시작했다. 발걸음에 여유를 찾은 순간
  ‘빵-!’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건널목을 물들이던 푸른빛은 붉은 경고를 하고 있었고, 오른편의 자동차는 경적을 울려댔다. 빛나의 동공은 커졌고 무대의 막은 오르기를 멈추었다. 두 손은 다시 하얗게 질려가고 발걸음은 그 간격을 잃어버렸다. 반대편에 도달한 빛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려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온통 그녀에게 모자이크 된 소음을 질러대고 있었고, 어느 누구 하나 보이지 않았다. 무대의 막은 오르기를 멈춘 채로 그대로였고, 무대엔 그녀 혼자만 자신의 순서를 모르고 나와 버린 배우처럼 멀뚱히 서 있었다. 빛나는 관객 없는 무대에서 혼자 독백과 같은 말을 했다.

  “여긴, 어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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