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학생은 등록금 마련, 취업이라는 현실에 쫓겨 사회적 의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데에 소극적이다.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개인적인 노력으로 현실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부조리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앙가주망(engagement)’뿐 이라고 주장한다. ‘앙가주망’은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뜻한다. 불어인 앙가주망은 원래 계약, 서약, 구속 등의 의미를 가지는데, 사르트르는 정치참여, 사회 참여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앙가주망을 이해하기 전에 사르트르의 사상이 ‘인간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에서 ‘인간은 신을 포함한 어떤 것에도 규정돼 있지 않다’는 그의 인간관이 드러난다. 심세광(성균관대 불어불문) 강사는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사물은 본질이 존재하지만 인간은 본질이 없는 백지상태”라며 “그는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삶을 만들어 나가는 자유로운 존재라고 봤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자유에 뒤따르는 책임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선택권을 가진 대신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고 말한다. 또 인간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타인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앙가주망’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르트르의 관심은 개인에서 타인과 사회로 향한다. 전쟁 속에서 인간을 억압하는 폭력과 착취를 경험하며 억압이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후 사르트르는 알제리 전쟁, 미국의 베트남 참전, 프랑스 68혁명의 중심에 서서 ‘앙가주망’을 실천했다. 1970년대에는 한국에서 김지하 시인이 반공법으로 구속되자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호소문에 서명해 김지하 시인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사르트르는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삶 속에서 철저히 ‘앙가주망’을 실천한 셈이다.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문학이 ‘타자에 의한 예술’과 ‘타자를 위한 예술’로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변광배(한국외국어대 불어불문) 교수는 “사르트르의 문학론은 ‘타자를 위한 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며 “여기서 타자란 억압받은 계층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억압받는 계층을 위해 문학이 사회참여적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는 주장은 역시 ‘앙가주망’과 맥락을 같이한다.
 
사르트르는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 무겁게 느껴진다고 해서 회피해서는 안 되며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고 자기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자기기만’이라고 말한다. 김상환(서울대 철학)  교수는 “실존적 고독에 부딪힐 때 역설적으로 앙가주망에 나설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얻을 수 있다”며 “사르트르는 사회적인 선택과 행위를 통해서 개인의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고 봤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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