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다보면 의지와는 무관하게 상황이 흘러갈 때가 있다. 그 대부분은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기 마련이며,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현명하고 단호한 의지로 극복하는 이야기를 원한다. 그렇다. ‘영웅’의 등장이다. 이러한 영웅들은 13척의 전선으로 수백 척의 적을 맞아 대승을 거두기도 하고, 귀가 멀어 들을 수가 없는데도 불후의 명곡을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초인적인 영웅들의 이야기는 오히려 그들이 ‘추락의 순간’을 극복해냈기에 필자와는 관계없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필자는 이렇게 조그마한 시련 앞에서도 벌벌 떠는데, 그들은 굳은 의지로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상황을 타개해 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한 권의 책은 ‘조선의 위대한 실학 사상가이자, 유배라는 혹독한 시련조차 <목민심서>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저를 쓰는 기회로 삼았던 위대한 사상가’를 ‘변해버린 자신의 처지에 한탄하고 어린 자식과 아내를 그리워했던 한 인간’의 위치로 내려놓았다.

벗이여 달빛 아래 술 마시려면 / 오늘 밤 저 달을 놓치지 말게 / 만약 다시 내일을 기다린다면 / 뜬구름이 바다에서 일어날 걸세 / 만약 다시 내일을 기다린다면 / 둥근 달빛 하마 이미 어지러지리

인간은 항상 인생의 어떤 단계에서 해내야만 하는 것이 있다. 그렇기에 항상 무언가를 준비해야 한다. 대학생은 직장인이 되기 위해 준비해야 하고 직장인은 결혼을 위해, 결혼은 또 다른 무언가를 위해…. 하지만 정작 본인은 현재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일쑤다. 항상 미래의 무언가를 준비하면서 현재를 희생한다. 그리고는 스스로 자신은 성실하게 살아오고 있다고, 지금은 내가 바쁘고 힘들지만 미래의 나는 다를 것이라고 위안한다.
 
하지만 다산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늘을 놓치면 바다에서는 구름이 일어나 앞이 보이지 않을 것이고, 아름다운 달은 이미 이지러져 내일은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답한다. 그때 문득 확신이 들었다. 필자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올라선 그의 조언인 만큼 믿어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려와 인생을 관조하며 남긴 말인 만큼 정말 솔직한 그의 심정이지 않았을까? 아직까지도 긴가민가하며 이리저리 흔들리던 필자에게 그의 한마디는 밀물처럼 시원하게 다가왔다. 그의 말이 ‘현재만을 즐기라’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살고 있던 필자에게 다산은 ‘그러지 말아라. 지금이 지나면 또 보지 못할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보지 못할 아름다운 풍경이다. 오늘이 행복하지 않다면 내일도 행복하지 않다’ 이렇게 충고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오늘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과거 시험 수 양제 때 시작됐는데 / 그 독이 이 땅까지 이르렀구나 / 찬연하다 한 편의 생원론이여 / 무릎 치며 쾌재 한 번 외칠 만하다 / 구름과 노을 같은 재주 갖고도 / 죄다 과거 향했다가 실패하였지 / 꾀죄죄 흰머리가 되어서까지 / 새겨 꾸미는 버 못 버린다네릇

필자는 사범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이다. 그러다 보니 이 구절이 너무나도 가슴에 와 닿았다. 이 땅의 학생들에게 이미 적성이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시험. 시험. 시험.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것이 기다리고 있다. 공부란 ‘배우고 익히는 것’이라는데, 이 땅의 학생들에게 공부란 이미 시험을 위한 것이 돼버린 것 같다. 공부를 하더라도 ‘시험에 나오는 방향대로 공부하는 것’이 옳은 공부가 되고, 스스로 찾아서 하는 탐구는 뒷전이다. 당연히 이런 공부는 재미가 없으니 시험을 보지 않으면 공부를 하지 않는다. 다산의 말대로 ‘구름과 노을과 같은 재주’를 갖고도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학자가 나오지 않는 것은 다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영재교육이니, 발견학습이니 하지만 결국 이러한 현실에 파묻혀 이과의 뛰어난 학생은 시험 성적에 맞춰 의대로 달려가고, 문과의 뛰어난 학생은 법대나 경영대로 달려가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의 문제이다 보니 딱히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다산도 이 부분은 마찬가지였던가 보다. 그저 탄식만 하고 있을 뿐이니.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과 ‘인간으로서의 다산’. 이 책에서는 이 두 면모를 모두 살펴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실패를 한다. 하지만 모두 다 실패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삭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산은 이를 훌륭하게 해낸다. 이 책을 관통하는 ‘삶의 추락’을 대하는 다산의 태도에서 우리는 가장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