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는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상황 속에서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행동에 따르는 책임이 부담스럽고 두려워서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번 호 1면 ‘학내 민주화’ 취재를 하면서 일반학생들이 학생회에서 일방적으로 결정된 사안을 전달받는 수직적인 소통구조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학과학생회가 일반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단과대학생회, 총학생회로 건의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학생회장들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움직이기보다 결정 사항을 따라오기만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왜 학내 사안에 대해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지 않는 걸까. 취재 도중 한 학생의 지적이 필자를 당황하게 했다. 그 취재원은 “당장 학과 내 문제뿐만 아니라 학교 내 큰 이슈에 대해서도 학생들은 무관심하다”며 “예를 들어 효원문화회관 문제도 학생들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받은 부분이 없어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을 때 필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 개인에게 돌아오는 불이익이 없으니 딱히 의견을 낼 필요성도 못 느낄뿐더러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곧바로 바뀌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참여의식이 부족하다’, ‘목소리를 높여야 된다’고 쉽게 말하지만 사실 필자도 한 사람의 학생으로서 사안에 대해 의견을 주장하고 표출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선 사안에 대해 논할 ‘참여의 장’이 부족했다. 또 장이 마련된다 해도 참여의 당위성이나 참여의 이유를 떠올렸을 때 대부분의 학생들도 필자와 같은 마음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거나 참여의식부족을 비판하기는 쉽지 않았다. 기사를 쓰면서 계속 혼란스러웠던 이유도 필자 또한 참여에 소극적인 학생이기 때문이었다.
 
사르트르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참여’의 시작이 된다고 말한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결단이고, 용기다. 조금 더 목소리를 높이고 참여의식을 가질 때 ‘과연 가능할까’했던 일들은 ‘가능한 일’이 되고 부조리한 현실이 바뀌기 마련이다.
 
사르트르는 어떻게 개인의 절대적인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면서 또 아름다운 공동체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 고민했다. 우리 모두 무관심을 넘어 어떻게 아름다운 공동체를 가능하게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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