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나 대학의 집합적 의사결정은 결국 그에 반대한 소수파들에게도 효력을 미친다. 의사 결정은 결정 규칙(투표 규칙)에 크게 좌우되는데 구성원의 “반수(半數)를 넘는” 동의를 요하는 과반수 규칙이 맹목적으로 적용되어 왔다. 과반수 규칙이 왜 이토록 당연시 되며 누가 그것을 결정 규칙으로 사전에 동의했단 말인가? 이제 우리는 올바른 “투표 규칙을 정하는 규칙”에 주목해야 한다. 헌법적 정치경제론의 “동의의 계산” 논리에 따르면, 5인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점심 식사할 장소를 과반수 투표로 정하려면 그 투표 이전에 어떤 결정 규칙으로 집단적 결정을 할 것인가를 정하는 사전 결정이 선존했어야 하며, 그 사전 결정은 과반수보다 더 많은 동의를 통해 이루어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근본적, 사전적 정당성은 따져보지도 않은 채 다수파는 무조건 과반수 규칙을 남용함이 현실의 비극이다. 정부나 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과반수 완력에만 의지하여 밀어붙이기로 일관하며, 소수파의 누군가를 잘라 내거나, 다른 의견 억압에 앞장서는 악행이 나타난다. 오직 다수 그룹에 소속됨을 자족하며 소수파 자르기를 즐기다가 이 와중에 손버릇이 되어 버린 칼질에 나중에는 자기 가족까지 잘라 내게 된다. 제 가족까지 자른 자가 누구인들 못 자르랴. 어용 위원회이든, 학과이든, 어떠한 단위의 집합체이든 과반수에 대한 미신이 남아 있는 사회에서는 결국 “마, 표겔(표결)로 하입시다!”가 만능 처방이 되고 좋은 대안 모색보다는 늘 과반수 만들기 경쟁에 골몰한다.
 

  과반수의 힘이 전능한 곳에서는 좋은 대안의 경쟁이란 없다. 오직 과반수를 형성하고는  자파의 욕망을 곧 ‘일반 의사’(Jean J. Rousseau)로 표방함이 곧 내쉬 균형 전략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란 곧 과반수 논리가 아니냐고? 타인에게서 5만원의 금전을 강탈함은 당연히 범죄이다. 그러나 과반수를 구성한 다수파가 소수파 구성원에게 5만원의 과세를 부과하고 그 혜택을 다수파 구성원에게 귀착시키는 정책결정은 정의라 함이 받아들여지는가! 민주주의가 생경한 과반수의 미신과 동일시될 때에는 그 이념이 수 천 년 동안 지키고자 했던 본질 자체를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의 ‘보존’이 아니라 적어도 ‘발전’의 가능성을 가지려면 오히려 중위투표자를 둘러싸고 있는 과반수 다중의 의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방향을 지향할 때에만 희망이 있다. 그 점에서 보면 우리 자신이 과반수 그룹에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한 순간은 이제 우리 스스로가 개혁되어야 할 때라는 의미이기도 하다(Mark Twain). 정규 분포의 귀퉁이에 떨어져 있는 소수가 무시되지 않아야 할 또 다른 이유이며, 발전과 개혁을 지향한다는 공동체라면 꼭 주목해야 할 국면이다. 과반수 만들기가 곧 만사라 여기는 자는 결국 자기 파괴적이다. 개혁이 혁명보다 더 어려운 이유는 전자가 소수자의 포용에 훨씬 더 세련되고도 값비싼 노력을 요하기 때문이다. 자칭 “큰 일”이라는 애매한 사업을 도모하는 차기 지도자 후보들이 이 어려운 일에 얼마나 잘 훈련되어 있는지가 준비된 잠룡과 과반수 놀이꾼인 잠뱀을 식별하는 표징이 될 것이다.
 

  다수가 소수자를 억압해서도 안 되지만, 소수자들도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기꺼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여론의 과반수 지지후보로 자처하던 김영삼이 1988.4.13 총선 직후, 소수자로 밀려난 그 짧은 기간을 결국 참지 못하고 끝내 민자당이라는 기형적 과반수 그룹을 급거 짜깁기한 국면이나, 옳고 그름에 민감해야 할 학자들이 영혼도 없이 과반수 파에게 금방 굴신함도 소수파의 신분상 책무를 몰각했기 때문이다. 과반수의 완력만 믿고 자그마한 조직에서도 전횡을 일삼다가 과반수 지배를 상실하자마자 급거 다른 곳으로 튀는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잘게 쪼개어진 새 조직에서 또 과반수를 만들겠다는 몸부림이다.
 

  똘레랑스 기제는 다중이 소수자를 존중하고, 소수자가 기꺼이 소수자임을 자처하는 곳에서만 가동되며, 이 때에만 집합적 행동은 야합의 경쟁이 아니라 정책 대안의 경쟁으로 변환될 수 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존중함이 곧 다수의 이득을 억압함이 아니다. 장기 게임에서는 현재적 소수자들 뿐 아니라 장래의 소수자인 지금의 과반수 구성원들 양측 모두에게 이득을 주며 그것이 지금보다 더 고등한 사회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넘어서야 할 것은 ‘반수’가 아니라 ‘과반수의 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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