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군은 서준식, 오창익과 함께 1세대 인권운동가에 속한다. 우리나라 인권운동의 역사와 함께 걸어왔다고도 볼 수 있다. 그가 1세대라고 해서 오늘날 인권운동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인권 침해가 자행되고 있는 용산, 강정, 쌍용의 싸움에는 박래군 인권활동가가 있다.

언제부터 인권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나요?
  처음부터 인권 운동에 관심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원래 꿈은 소설가였죠. 대학 1학년 때는 소설만 썼을 정도니까요. 이런 문학청년을 활동가로 만든 것은 순전히 시대 상황이 아닐까 생각해요. 내가 대학을 다닌 시기는 1980년대로 민주화를 위한 학생운동이 활발했거든요. 문학회 선배가 갑자기 군대로 징집당하거나 경찰이 학교 내에서 불심 검문을 하는 것 등은 흔한 일이었어요. 독재 정치가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나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나를 분노케 했고요.

당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투쟁했던 학생들은 거의 현실 사회에 편입됐는데요. 여전히 노동운동과 인권운동에 몸담고 있는 이유가 있나요?
  1990년대에 사회주의 사상이 붕괴하면서 당시 대학생들은 큰 충격을 받았어요. 동경하던 사회상이 붕괴하면서 갈 곳을 잃었던 거죠. 또한 선택된 계층이었던 대학생이라는 지식인이 노동자의 지위로 변해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다들 학생운동이 힘들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더라고요.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계속해서 내가 운동권에 남아있었던 이유는 동생 때문이에요. 학생운동 당시, 1988년에 동생이 숭실대학교 옥상 위에서 “군부 파쇼를 타도하자”며 분신하고 죽었거든요. 동생의 분신은 충격적이었죠. 이전에도 열사의 장례식에 참여한 적이 있었지만 죽음을 직접적으로 느낀 것은 처음이었어요. 분신으로 죽은 동생의 시신은 끔찍했죠. 이후 민주화운동유가족협회(유가협)에 가입하게 됐고 수많은 죽음과 분노, 슬픔을 봤어요. 그 슬픔이 지금의 박래군 인권운동가를 탄생시킨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가협에서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치열하게 활동했다고 들었습니다. ‘재야의 장의사’라는 섬뜩한 별명도 있었다구요.
  무서운가요?(웃음)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발생했던 수많은 열사들의 장례식에 참여하면서 생긴 별명이었죠. 사건이 발생하면 유가협 사무국장인 저에게 전화가 왔고 전 장례식을 전두지휘했어요. 그리고는 의문사의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제 역할이었어요. 심한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인가, 사고사인가 등을 파악하는 겁니다. 고문으로 인해 사망이라면 국가를 대상으로 소송을 해야 했거든요.
  의문사가 얼마나 많았냐하면 밥 먹을 때도 계속해서 부검사진을 봐야할 정도였어요. 같이 밥 먹던 분들이 ‘밥먹는데 그것 좀 치워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처음에는 학생운동을 하셨고, 그러다 노동운동을, 지금은 인권운동을 하고 계시는데요. 싸우는 대상이 변하신 이유가 있나요?
  시대적 배경 때문이죠. 시대 변화에 따라 인권운동의 대상이 달라진 겁니다. 그러나 큰 범주 안에서 인권운동을 했다고 생각해요. 학생운동, 노동운동 모두 ‘인간답게 살고자’ 투쟁한 거죠. 단지 운동의 주체가 대학생, 혹은 노동자라는 차이밖에 없고요. 당시 학생운동이 인권운동이라 불리지 않았던 것은 ‘인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입니다. 말 그대로 학생들의 투쟁이 ‘인권’과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죠.
  인권운동사를 바탕으로 봐도 인권 운동의 대상은 조금씩 변해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 KNCC 인권위원회가 설립되면서 인권운동이 시작됐는데요. 당시는 독재에 의한 억압이 심해 정치 민주화를 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과제였습니다. 그러다 1987년에 민주화되면서 정치적인 권리를 찾는 운동과 함께 경제사회적인 문제도 고민하기 시작했고요. 최근에는 성소수자 문제와 같은 차별 문제에 대해 집중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인권운동의 영역이 점차 확장되고 있는 거죠.

인권운동을 하면서 힘든 적이 많았을 텐데. 가장 힘들었던 경험은 무엇인가요?
  용산참사 때 수배당했던 시기에요. 사실 수감시절은 별로 힘들지 않아요. 오히려 감옥 생활은 인권운동가로서 경험이 될 수도 있죠.(웃음) 주변사람이 힘들뿐이에요. 당시 불법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수배 당했는데 10개월간 계속됐었죠. 10개월간 한 구역에 갇혀 24시간 경찰에게 감시받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또 용산참사 집행위원장으로서 시위를 계속 진행해야 하는데 수배당하면서 어떤 것도 진행할 수 없었죠. 주변 사람들에게도 너무 미안하고 개인적으로도 심리적인 압박감이 심했던 시절이었어요.

오늘날에는 인권이 어느 정도 보장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러한 상황에서 인권운동이 필요할까요?
  지금도 우리나라 곳곳에서 인권을 침해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죠. 교묘하게, 그리고 사회 구조적으로 인권 침해가 자행되고 있어요. 이렇게 침해당하는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인권운동은 여전히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비정규직 문제와 경제적 불평등 심화는 오늘날 인권 침해의 대표적인 사례죠. 80년대에 비정규직 문제는 없었습니다. 평생직장은 당연한 얘기였어요. 그러다 IMF가 발생한 이후 비정규직이 등장한거죠. 명백히 노동자의 인권 침해였어요. 비정규직이 등장한 당시만 해도 이는 당연하게 이해될만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오늘날에 비정규직이 당연시 여겨지게 된 겁니다.
  사회구조적으로 인권을 침해하다보니 이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주체는 인권을 침해받고 있는 당사자로 제한됩니다. 이는 큰 문제에요. 인권 운동 주체가 제한되면 상황을 변화하기가 힘드니까요. 또한 사회로부터 차별당할 때만 인권을 찾고, 인권운동을 한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제는 인권운동을 생활화, 의식화해야 하는 단계에요.

정권의 변화가 인권 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나요?
  정권의 변화는 인권 운동이 대적하는 대상의 변화를 이끌었어요. 즉 전두환, 박정희 정권 때는 정치적인 측면의 인권이, 오늘날에는 사회·경제적인 측면의 인권을 수호하기 위한 운동이 진행됐죠.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의 경우 정치적으로는 탈권위화됐지만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됐다는 점에서는 사회·경제적 인권을 억압했다고 볼 수 있어요. 노무현 정권 때 비정규직 문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됐고 평택의 미군기지 설립, 새만금 사업과 같은 국책 사업의 강행이 대표적인 사례죠. 지금은 인권 보장이 역행하고 있는 상황이라 볼 수 있어요.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어떤 세상을 꿈꾸시나요?
  궁극적으로 각종 차별이 사라진 사회를 꿈꿉니다. 여러 분야의 차별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국가 폭력, 사적 폭력, 자본 폭력이 해결돼야 하겠죠.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용산 참사, 쌍용자동자 파업, 강정 마을 사건 등에서 이러한 폭력들이 결합돼 나타나고 있어요.
  결과적으로 인권이 완벽하게 보장된 사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시대가 변하면 등장하는 인권 문제도 변화하기 때문이죠. 제가 죽을 때까지 원하는 세상이 올지는 미지수네요.

부대신문 공통질문입니다. 자신의 20대를 상징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흠. 가장 어려운 질문이네요. 주변에서는 20대의 저를 ‘애늙은이’라 불렀어요.
  흔히들 20대가 인생의 황금기라고 하죠. 그런데 나의 20대를 돌이켜 보면 그렇지 만은 않은 듯해요. 20대였던 나는 강제징집 당했고, 동생의 죽음을 겪어야 했으며 노동운동을 하면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기도 했죠. 전 생애에 걸쳐 경험하는 것들을 저는 20대 시절에 10년 동안 집약적으로 겪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나에게 청춘이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20대, 10년을 상징하는 적절한 표현을 찾기 힘드네요.

그렇다면 인생의 마지막 10년은 어떻게 보내고 싶으세요?
  소설가로서 살아가고 싶어요. 홍명희의 <임꺽정> 같은 소설을 쓰고 죽고 싶네요.(웃음)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