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공지사항에 들어갔다가 ‘성차별’, ‘성평등’ 이라는 주제로 사진공모전을 하고 있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됐다. 일반 공모전이 아닌 사진 공모전이라는 것이 필자의 흥미를 끌었고 ‘평소에 그냥 지나쳤던 일상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공모전에 나가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필자가 주제로 삼았던 것은 화장실의 표지판이었다. ‘남자?여자 화장실을 구분하는 것은 글자가 아니라 색깔과 표지판의 그림이라는 것, 그것이 개선돼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었다. 우리는 치마와 바지로, 빨강과 파랑이라는 색깔로 화장실을 구분하지 그 밑의 글자를 보고 화장실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급히 화장실에 들어가야 할 때는 글보다 그림이 시각적으로 잘 구분되는 등 다른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남자와 여자를 파랑과 빨강으로, 바지와 치마로 구분 지어져 왔던 우리의 인식이 들어가 있지는 않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예로 새로 태어난 아기들이나 영?유아들에게 옷을 사줄 때에도 우리는 색깔과 옷의 모양, 바지 또는 치마와 같은 형태 등으로 아이들의 성별을 구별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우리도 모르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필자는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또한 이것이 성차별적인 현상이라고 단정 짓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이러한 현상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함께 나눠보고 싶었고 우리가 한 번쯤은 고민해볼 논제라고 생각했다. 이번 공모를 하면서 필자가 느꼈던 것은 ‘성평등과 성차별의 선이 어디까지 인가?’라는 것이었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힘은 매우 크며 그런 언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힘은 더 크다. 그리고 ‘의견’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생각은 너무나도 다양하다. ‘성평등’이라는 단어가 생기고 난 후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쪽의 성이 차별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 차별받고 있는 느낌을 줄이기 위해 수세기동안 많은 이들이 노력해왔고 지금도 역시 성차별을 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 선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이 문제는 매우 민감한 문제로 여겨진다. 생물학적인 성의 차이로 생겨나는 어떠한 현상을 우리는 ‘차별’로 볼 것인가 아니면 ‘차이’로 볼 것인가? ‘성평등’이라는 것은 남녀의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상황에서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차이를 인정하는 부분을 남겨두면서 일정 부분에서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인가? 한쪽을 위한 평등의 정책이 다른 쪽에겐 차별의 정책이 될 수 있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
  여기까지 읽는다면 모두들 화가 날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여기에 필자의 해답은 ‘배려’와 ‘양보’다. ‘성평등’이라는 말로 우리는 은연중에 ‘성차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내가 차별받고 있다고 여겨질 때 우리는 분노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연의 마음이다. 하지만 그 속에 양보와 배려가 들어간다면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더라도 분노하지는 않는다. 평등이나 차별이라는 단어대신 서로에 대한 ‘배려’와 ‘양보’라는 단어로 서로를 대한다면 좀 더 발전된 모습의 사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속에 우리는 진정한 기쁨과 평등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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