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동안 바늘을 놓지 않은 침선장 구혜자 선생

  1970년 결혼과 함께 본격적으로 바늘을 만진 구혜자 선생.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기능보유자로, 40년이 넘도록 한복을 짓고 있다. 침선장은 침선기술을 가진 사람을 칭하는 말로, 바느질로 의복과 장신구를 만드는 일이 바로 침선이다. 선생은 “한복은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라며 “침선장은 한복의 선, 문양, 색채 등을 고려해 고유성을 보존하고 입는 이와 소통하며 옷을 만드는 장인으로, 한복의 요소를 서양 복식에 적용하는 디자이너와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무려 42년을 바늘과 씨름하고 한복을 짓는 일에 힘쓴 선생은 여러 가지 역경과 기쁨의 순간들 속에서도 스승께 침선기술을 배우던 그 순간은 좀처럼 잊을 수 없단다. “선생님께 침선기술을 배울 때가 여전히 생생하다”며 “무(無)의 상태에서 바느질을 배우면서 야단도 많이 맞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에 침선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으며 수십 년의 노력이 결실을 맺자 선생은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묵묵히 제 길을 걸으며 장인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20대 때부터 바느질에 소질을 보였나?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바느질을 그리 많이 하지 않았다. 6.25전쟁 후에 서양복식이 들어오면서 한복은 점차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만 입는 옷으로 변해갔던 시기였다. 또 나는 바느질, 한복 등과는 전혀 무관한 공부를 했다. 글을 무척 좋아해서 대학에서 문과를 전공했고 당시만 해도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처럼 능숙하게 바느질을 하지도 못했고 한복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40년 이상 바느질을 하고, 한복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그 시작이 궁금하다.
  나의 시어머니는 침선장 1대 기능보유자였던 정정완 선생이고 나는 그 댁의 큰며느리로 늘 어머님을 도와 많은 집안일을 했다. 바느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바느질은커녕 가위질도 서툴러서 혼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머님께서는 자녀들이 외국을 나가거나 중요한 일이 생기면 꼭 옷을 직접 지어주셨다. 그 옆에서 내가 돕곤 했는데 1988년 침선장 기능보유자가 된 어머님 밑에서 교육조교로 일하면서 더욱 공부에 매진하게 됐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문화재청에 실사를 받고 마침내 2007년에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고 지금껏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일을 이토록 오랜 시간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떻게 침선기술을 배웠는지 자세히 듣고 싶다.
  한 집안의 큰며느리다보니 해야 할 일이 많아 남들은 1년이면 배울 것을 나는 3년이나 걸려서 배웠다. 또 당시 선생님 옆에는 많은 학생들이 있었고 나는 그 사이를 헤집고 나설 수가 없어 어깨너머로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0년쯤을 배운 후에 선생님이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으면서는 우리 집을 떠나 둘째 집에서 머물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나는 또 10년 정도를 아침마다 가방을 메고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어떤 때는 바늘도 잡아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도 있었다. 학생들이 오지 않는 일요일에 선생님을 찾아가면 피곤해서 누워계시곤 했는데 그 모습을 보면 눈치를 보다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선생님께서 기능보유자가 된 이후에는 내가 교육조교로 선생님의 제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선생님의 맥을 잇되 선생님과 학생들 간의 세대 차이가 있었으니 학생들이 받아들이기 편하고 나도 가르치기 편하게 여러 기술과 지식을 정리했다. 그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책이 바로 <침선노트>다.

반백을 함께 한 한복,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한복은 ‘우리나라 옷’이다. 이말인즉슨 우리 한복에는 우리나라의 ‘고유성’이 반영돼야 한다는 것이다. 고유성은 색채, 문양, 천 등에서 표현되는데 요즘에는 생활한복, 계량한복이라는 이름으로 고유성이 사라진, 국적불명의 옷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어 큰일이다. 외국에 우리 옷을 전할 때도 순수한 한복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한복을 입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온전한 조선의 옷을 전해야 한복의 미를 완전히 알릴 수 있지 않겠나. 물론 한복의 선이나 문양에서 모티브를 얻어 서양복식을 만드는 것까지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한복을 만들고 있나?
  양복이나 한복이나 한 벌의 옷이 완성될 때까지는 입는 사람, 짓는 사람 간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짓는 사람은 입는 사람이 언제, 어디에서 옷을 입는지를 파악해 책임감을 다해 옷을 지어야 한다. 또 입는 사람은 정성껏 옷을 지어준 이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옷을 입어야 한다. 짓는 이와 입는 이의 마음이 어우러져야만 옷의 아름다움이 표현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빠른 게 미덕이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아야만 성공한다고 말한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20대는 느림의 미학을 잊어버렸고 대기업에 취업해 ‘빠른 성공’을 하고 싶어 한다.
  뚜렷한 이상을 지니고 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금세 이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 직장을 다녀도 10년 이상은 다녀야 요직에 오를 수 있다. 무엇을 하더라도 10년 이상은 해야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품은 바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회의감이나 절망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이 삶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감각적인 것, 금세 결과물이 나오는 것에만 관심이 많다. 하지만 10년 이상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고 나서야 ‘이 길을 계속 걸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 자신의 어떠한 존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이 적립될 수도 있다. 이러한 과정을 견뎌내야 익숙해지고, 또 어떠한 일을 천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20대에게 ‘한 가지 일을 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자신이 어떤 것을 원하고 또 어떤 능력이 있는지 파악했다면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한 우물을 파라.

현재 침선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고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최고의 자리에 올랐는데 또 다른 목표가 생겼나?
  겸손하게 보이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고, 또 이렇게 말하면 오만인지를 모르지만 나는 대한민국은 최고, 1인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말하지도 않는다. 옷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많다. 동대문 시장만 가도 옷 짓는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그들만 해도 수십 년 동안 옷을 만드는 일을 했다. 그들의 재봉틀 기술을 나는 따라잡지 못한다. 그들 역시 훌륭한 기능인이다. 물론 국가에서 중요무형문화재를 지정하고 기능보유자로 누군가를 인정하는 것은 전수할 가치가 있는 기능을 보전하고 또 전승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침선기술을 보전하고 전승해야 할 책임을 지닌 사람일 뿐이다. 내가 최고라거나 대한민국 1인자라거나 하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다만 최고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노력하는 것일 뿐이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 출토복식 등에 대해 더욱 공부해서 보다 좋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 싶다. 완벽한 작품을 만들지 못한다고 해도 완벽에 가까운 작품을 만들어서 후진들에게도 전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끝으로 부대신문의 공통질문이다. 당신의 20대를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20대 때는 상당히 많은 책을 읽었다.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 카뮈의 <이방인> 등의 고전을 감명 깊게 읽었다. 지금은 책의 줄거리를 줄줄 꿰거나 구절을 암송하지는 못하지만 책은 읽으면서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쌓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영양소가 되는 것이다. 나의 내면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 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확신한다. 지금도 여러 책을 읽으면서 영감을 받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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