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만화의 대부, 박재동 화백

  ‘우리나라 시사만화는 박재동 이전과 박재동 이후로 나뉜다’ 박재동 화백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수식어는 없을 것이다. 그는 혜성처럼 시사만화계에 등장했다. 박재동 화백만의 독창적인 표현방식과 대상을 가리지 않는 풍자의 대담함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박 화백의 네모난 틀 속에는 80년대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 담겨있다. 그러나 그의 만평은 슬프지 않다. 오히려 그의 시사만평에는 웃음이 담겨있다. 시사만평에 만화 요소들을 더했기 때문이다. 이런 그에게 우리나라 시사만화의 대부라는 표현은 당연히 붙어야 할 수식어일지 모른다.

시사만화가로서 출발은 언제로 볼 수 있을까요?
  본격적인 시사만화가로서의 출발을 꼽자면 1988년 한겨레신문에 시사만화가로 뽑히면서 부터지. 그러나 처음부터 사회 운동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 오히려 대학 시절의 나는 철저한 예술지상주의자였으니까.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이 미비했던 거지. 시사만화가로서의 사회의식을 갖게 된 것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알게 되면서부터야. 그 사건 이후 예술에 관한 인식이 바뀌었지. 진정한 예술은 현실에 기반하며 사람들의 삶을 다뤄야 한다는 것으로 미약하지만 시사만화가로서 출발이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때부터야.

예술지상주의자였다니. 지금 모습에서는 상상이 잘 안되네요.
  그 때는 그랬어.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권아래서 대학시절을 보냈는데 허구한 날 학교는 휴교를 했어. 그 모습을 보면서 정치를 불신했고. 우리나라 사회와 정치를 외면하려 했던 것 같아. 그러다가 앞서 말한 광주 민주화 운동을 목격하면서 생각이 바뀌었고.
  이후 ‘현실과 발언’이라는 미술 동인에 참여했어. 이미 동인에서 활동하고 있던 친구들의 영향으로 참여하게 됐어. 현실과 발언은 말 그대로 오늘날 현실 문제를 발언해보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거야. 많은 예술가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현실 문제를 지적하려고 했어. 판화도 있었고, 걸개그림도 있었고. 거기서 나는 만화를 통해 현실 참여를 시도했어. 당시 만화를 점차 예술의 일종으로 보고 있었거든.

‘현실과 발언’에 참여한 이후 시사만화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당시 박재동 화백의 한겨레 그림판은 큰 인기를 끌었는데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당시 대통령, 안기부 등 풍자 대상을 제한하지 않고 마음껏 비판했어. 편집장이 말릴 정도였으니까. 당시 도마뱀으로 묘사된 대통령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모습을 그렸는데, 편집장이 얼마나 말리던지. 이 점이 대중을 후련하게 해줬을거야. 이전의 시사만화는 너무 점잖았거든. 그림도 재미없고, 스토리도 없고, 권력자를 노골적으로 풍자·비판하지도 않았으니까, 선비 같았지 뭐.
  그런데 내가 시사만화에 말풍선도 넣고, 컷 수도 두 컷에서 많게는 여덟 칸까지 나눴거든. 당시로는 파격적인 형식을 도입한 거야. 사람들이 읽기에 재밌었던 것 같아. 어렸을 때부터 읽어왔던 만화요소가 자연스레 반영된 건데 말이지.

시사만화에 만화의 요소를 더한다라. 당연한 말 같은데요.
  당시는 만화가 유해물이라는 인식이 강했어. 그리고 애들이나 보는 거라고 치부해버리기도 했지. 말풍선을 넣는다는 것 자체가 아동용 만화를 그린다는 말과 동일할 정도였으니까.

이러한 사회적 인식에도 만화에 확신을 갖고 만화적 요소를 시사만화에 적극 도입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여렸을 때 아버지가 만화방을 했어. 그러면서 자연스레 만화를 접하게 됐지. 하루에 스무권 씩 읽었던 것 같아. 이렇게 만화를 많이,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면서 어른들이 왜 만화를 나쁘게 보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어. 나는 만화가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확신했으니까. 만화는 역사와 과학에 관한 정보와 사람들이 지녀야 할 교양과 덕성을 다루는데 말이지.

시사만화하면 떠오르는 것은 인물의 특징을 잘 묘사한 그림인데요. 가끔 묘사된 인물만 봐도 웃음이 나올 때가 있어요.
  시사만화에서 인물 묘사는 정말 중요해. 독자가 풍자하는 대상이 누군지 모른다면 만화의 이야기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인물 묘사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과장을 하는 거야. 그 사람의 얼굴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을 강조해야해. 만약 이명박 대통령을 묘사한다면 눈은 아주 조그마하게 그리고 코는 길쭉하게 그려야 하겠지? 인물 묘사하는 건 생각보다 힘들어.
  시사만화가 사회문제를 많이 다루다보니 자연스레 정치인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아. 당시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 모두를 풍자해서 그렸었지. 그런데 가장 기억에 남는 정치인 하면 김종필 전 총리야. 당시 김종필 전 총리를 묘사할 때 앞니 두 개만 커다랗게 묘사를 했는데 그게 불만스러웠나봐. ‘아~ 이를 그렇게 크게 그리고 말이지’라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한 적이 있었어.(웃음)

시사만화가로 명성을 높이다가 1996년 돌연 한겨레 그림판을 떠나셨는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한창 활동할 당시를 생각해보면 나는 시사 만화가로서 활동한 것은 아닌 것 같아. 그냥 민주화 운동의 일종이었어. 그 수단으로 만화를 택했을 뿐이지. 그러니까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 만화를 통해 민주화, 현실 참여를 했던 거였지.
  그러다보니 어느 정도 민주화 운동이 진척된 지금 내가 시사만화가로서 활동할 동기부여가 없어진 셈이 됐지. 거기다 8년간 활동하다보니까 아이디어가 많이 소진된 것도 사실이고. 이제는 후배들에게 시사만화의 자리를 내줘야할 때라고 생각해.

그렇다면 요즘 후배 시사 만화가들을 보면 어떠세요?
  후배들이 참 잘하는 것 같아. 내가 봐도 까무러칠 정도로 펀치가 세더라고. 그런데 각 신문사마다 시사만화의 비중을 줄이고 있는 추세라 마음이 안 좋아. 좋은 시사 만화가는 등장하는데 이들이 활동할 영역은 없는 거잖아.
  잘하고 있지만 후배들이 지켜줬으면 하는 건 있어. 내가 시사 만화가로 활동할 때 규칙이 있었어. 하나는 사실에 근거해서 만화를 그려야 한다. 둘째는 인신공격은 하지 않는다. 셋째는 잘못된 풍자를 했을 때는 분명히 사과해야 한다. 이 세 가지야.
  시사 만화가는 예술행위를 하는 동시에 언론행위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 특히 시사만평의 경우는 신문 지면에 직접 실리고 있지. 시사만화는 그림으로 말하는 논설이야. 오락 요소가 섞인 논설인거지. 그러한 점에서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은 정말 중요해. 사실을 확인했는데도 잘못됐다면 사과를 해야지. 그것이 자신의 신뢰를 높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나도 2번 사과한 적이 있어. 축사 오물 때문에 한강이 더러워진다는 내용이었는데, 잘못된 내용이었어. 한강 오염의 주 원인이 축사 오물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사과했지. 당연한건데 다들 안 하더라고.

시사만화가 은퇴 이후에 더욱 활발히 사회운동을 하시는 것 같아요. 박원순 서울 시장의 선거에도 멘토로 참여하셨는데요. 전 시사만화가의 직함을 지닌 채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은 없으셨나요?
  거부감이 없었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지. 시사만화가는 보수든 진보든 제3자의 입장에서 비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어느 한 진영에서 활동한다는 사실 자체가 독자에게는 객관적인 비판을 할 수 없다고 비춰질 수 있으니까. 그래서 고민이 많았던 것 같아. 많은 고민 끝에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와주는 것이 지금 나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다양한 사회활동 중에서도 특히 문화운동에 열성이신 것 같아요. 최근에는 어떤 활동에 주력하고 계세요?
  어렸을 때부터 만화에 관심을 가져왔고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만화가로서 계속 활동했어. 이런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자연스럽게 문화운동에까지 관심을 갖게 된 거지. 다양한 문화운동 중에서도 특히 문화민주화에 관심이 많아. 이를 위해 최근에는 손바닥 그림 그리기 운동을 펼쳤어. 대부분 사람들은 미술은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게 잘못됐다는 거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노래방에 가서 노래 부르잖아? 그런데 왜 미술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나는 그 이유가 큰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손바닥만 한 그림을 그려보자고 제안하는 거고. 문화에는 고급문화도 하위문화도 없어. 모두 다 즐길 수 있는 문화만 있을 뿐이지.

  박재동 화백에게 대학 시절은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다. 이는 대학 시절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어제보다 오늘, 매일매일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며 “그렇기에 나는 어제의 나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며 대학생 박재동보다 지금의 나는 훨씬 나은 사람이다”고 말한다. 박재동 화백은 자신의 발전은 작품의 발전으로 이어지며 더 나아가 사회의 발전에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다. 이런 그의 노력은 오늘도 종이 위에 아로새겨져 빛을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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