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마항쟁 발원지 표지석과 10.16기념관이 나란히 위치해 있다

1979년 부마항쟁, 1987년 6월 항쟁 등 우리 학교는 민주항쟁의 중심지였다. 당시 우리 학교는 독재타도를 외치는 학생들로 가득 찼다. 지금도 우리 학교에서는 그때 그 시절 학생들의 치열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1980년대 우리 학교에는 사복 경찰이 많아 민주항쟁이 일어나지 못했다. ‘유신 학교’라는 오명이 붙을 정도였다. 이희길(영어영문 80, 졸업) 씨는 “이화여대에서 우리 학교 총학생회에게 가위를 보내 굴욕을 줬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며 “민주항쟁에 소극적인 총학생회는 남자도 아니라는 의미였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김형진(회계 82, 졸업) 씨는 “1983년 10월 5일 하근 씨가 사회대의 한 나무에 올라타 연설을 하면서 민주화 운동의 불꽃이 타올랐다”고 전했다. 이 때 잠복해있던 사복 경찰은 하근 씨를 구속했고 우리 학교 민주화 운동의 첫 시작을 알리는 이 나무를 베어버렸다.
 
이 외에도 우리학교에서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것들을 찾아볼 수 있다. “민주항쟁을 한다고 하면 모이는 곳은 언제나 ‘넉넉한터’(이하 넉터) 왼쪽 스탠드였다”고 말하는 김형진 씨. 넉터는 ‘넉넉한 터’라는 의미와 함께 ‘넉넉한 가슴으로 투쟁하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안주현(식품영양 1) 씨는 “선배들이 이러한 운동을 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고 전했다.
 
인문대학의 손잡이도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다. 과거 본부는 인문대학의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데모하는 학생들이 총장실 앞 복도를 지나 계단까지 진입하면서 안전상의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학교 측에서 손잡이를 설치한 것이 인문대학 손잡이의 탄생 일화다.
 
우리 학교를 대표하는 민주항쟁은 부마항쟁이다. 실제로 우리 학교에는 10·16 부마항쟁탑과 부마항쟁 발원지 표지석, 10·16 기념관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념물들은 현재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10·16 기념관 역시 10·16이라는 명칭을 제외하고는 부마항쟁을 나타내는 전시물이 아무것도 없다. 더불어 이러한 기념물들은 학교 지도의 어디에도 표시돼 있지  않다. 최유미(분자생물 2) 씨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던 부마항쟁이 일어난 발원지로서 학교는 이를 보존하고 학생들에게 알렸으면 좋겠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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